클릭! 이 사람 _ 특별한 것은 없다 /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얼마 전 과학자의 만물상이라는 주제로 갤러리 전시를 했다. 서울과 지방을 포함해 6개월의 대장정이었다. 사람들은 대형 백화점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했으니 이제 취미를 벗어났다고 이야기한다.

나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특별한 뭔가가 아닌 일상의 하나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다. 누구나 그 시절에는 그림 그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나. 하지만 언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철이 들면서 다른 취미로 눈을 돌린 것이다.

다른 점은 없다. 단지 내가 꾸준히했다는 것에 차이점이 있다면 모를까. 그저 좋아서 이 나이까지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왔다면 믿을까. 이 전시회를 위해 특별히 그림을 준비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내 연구실과 작업실에 있었던 그림들과 물건들을 모아서 트럭에 싣고 전시장에 배치했을 뿐이다. 누구나 꾸준히 한다면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까.

나는 그림 그리는 것과 물리학이 어울리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면 그렇다간단히 대답하곤 한다. 백지 위에 그림을 완성해 가는 과정은 연구 과정과 같다. ‘무엇을 그릴까? 어떻게 그릴까? 무엇으로 그릴까? 이런 생각으로 무슨 연구를 할까? 어떻게 연구를 할까? 어떤 장비를 이용해서 연구를 할까?’와 같은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그림과 과학의 시작은 한번 해보고 싶은 호기심과 열정이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나에겐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이 둘이 같은 일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물리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적은 없다. 그저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물리 선생님에게 칭찬을 듣곤 했다. 그래봤자 물리 잘하는데정도였고, 다른 학생들보다 시험을 잘 본 것뿐이었다.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잘한다는 건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당시에는 내가 물리를 제법 잘한다는 대단한 착각에 빠졌었고, 그것은 곧 물리를 잘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발전했다. 그 간단한 생각으로 물리학과를 선택했지만 정작 대학에서는 열심히 하지 못했다. 당시 80년대 초는 차분히 공부할 수 있는 정치적인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졸업할 즈음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다른 학생들은 공부를 마치고 졸업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나는 뒤늦게 물리에 대한 열정에 휩싸였고, 그 누구도 이 열정을 막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을 다 포기하고 물리학에 빠져들었다. 석사과정에서 박사를 받고 박사후 과정까지 15년 간은 물리학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니 40살을 앞둔 나이였다. 다행히 교수가 될 수 있었고 여기까지 왔다.

지금 물리학은 나의 직업이다. 내가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필요한 경제적인 받침이 되고 있으니 얼마나 신성한 일인가. 열심히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고, 달리 특별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흥미를 갖고 35년 정도 물리학을 공부하면 최소한 나 정도는 하지 않을까.

글 쓰는 작가로 나를 바라보는 분들도 계신다. 지금까지 21권의 책을 냈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시작은 미미했다. 처음 책을 낸 것은 일본에 있을 때 두 딸아이를 위해 한글 동화책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한글을 잊지 않게 해주고 싶어서 굴러다니는 노트에 아이들 필통에 있는 사인펜으로 만든 동화책이었다. 이후 그 동화책은 이삿짐에 실려 서울로 왔고 책장에 꼽히게 되었다.

어느 날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동화책을 편집자가 보고 나서 책으로 한번 엮어 볼까요?”하고 먼저 제의했다. 그렇게 첫 동화책이 만들어졌고, 하루아침에 동화작가가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간헐적으로 원고 청탁이 들어왔고, 청탁이 오면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가장 행복한 시간에 글을 쓰고 일러스트를 그렸다. 그러다 보니 한번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 보죠?” 하며 제안이 들어오게 되었고, 한두 권의 책이 더 만들어졌다. 돌이켜보면 계획해서 만든 것보다 자연스럽게 뭔가를 하던 중 만들어진 책들이 더 많다. 지금은 팔리지 않아 대부분의 책들이 절판되었고, 중고책 시장에서만 구할 수 있다. 출판사 편집장들과 열심히 만들었지만 팔리지 않아서 사라지는 책들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나이의 한계를 인정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혼자 살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가 되지 않는다. 고작 숨쉬기 정도가 아닐까? 그것 역시 농부들이 일 년을 고생해서 만든 쌀밥의 힘으로 숨을 쉬고 있으니 엄밀히 따지면 혼자만의 일도 아닌 셈이다. 세상에는 특별한 것은 없다. 꾸준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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