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사이먼 래틀

그의 21세기는 계속된다


베를린 필하모닉에 이어 런던 심포니를 이끄는 은발의 지휘자가 만들 새로운 역사

잠시 꿈을 꾸는 듯했다. 사이먼 래틀(Simon Rattle, 1955~)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피아노에 조성진이 앉아 있었다. 라벨 피아노 협주곡 2악장. 찬란한 햇빛 냄새 위에 내밀한 향기를 머금은 파스텔 톤의 피아노 음이 부유하고 있었다. 2017년 11월 1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음악감독 래틀과 함께하는 마지막 내한 무대였던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의 첫날 단상이다. 가장 잘하는 프랑스 레퍼토리를 연주한 조성진의 협연이 기억에 남지만, 그 외에도 ‘고성능’ 베를린 필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장면들이 있었다. 첫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돈 후안’은 낙차 큰 롤러코스터 같았고, 둘째 날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슈카’는 오색 기둥으로 된 커다란 만화경을 보는 듯 휘황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서 클라우디오 아바도에 이르기까지 어두운 금속이었던 베를린 필의 음색이 16년 동안의 래틀 시대에 밝은 신소재 섬유로 바뀌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음악감독으로서의 래틀과 베를린 필이 함께 한 최후의 무대는 올해 6월 23일 발트뷔네 콘서트였다. 래틀은 포레 ‘파반느’와 래틀의 아내인 막달레나 코제나가 부른 캉틀루브 ‘오베르뉴의 노래’ 등으로 베를린에서의 고별을 장식했다. 작년 9월 14일 바비컨홀에서 런던 심포니 수석지휘자 취임 음악회를 치른 래틀은 오는 10월 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런던 심포니를 지휘한다. 작년 음악감독 래틀과 베를린 필의 마지막을 목도한 우리나라 청중들, 올해는 수석지휘자 래틀과 런던 심포니의 첫 모습을 지켜본다.

어두운 금속에서 밝은 신소재 섬유로, 래틀이 바꾼 음색 

타악기를 전공한 후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된 래틀은 리버풀 신포니아를 설립해 지휘했다. 래틀의 재능은 20대가 되기 전에 빛을 발했다. 1973년 존 플레이어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타악기 스틱 대신 지휘봉을 들었다. 본머스 심포니·BBC 스코티시·로열 리버풀 필하모닉을 객원지휘하며 관록을 쌓았다.

1980년 25세의 래틀이 버밍엄 시립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로 부임하면서부터 버밍엄 시는 공업도시에서 문화도시로 변모했다. 변방의 악단을 세계적인 명문으로 도약시킨 래틀의 힘이다. 큰 스케일에 엄청난 다이내믹을 선보이며 종교적 분위기까지 살린 버밍엄 시향의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음반은 단숨에 애호가들을 사로잡았다. 1998년 버밍엄 시립교향악단을 떠난 래틀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포디움에 올랐다. 베를린의 터줏대감 다니엘 바렌보임과 카라얀의 제자 마리스 얀손스를 제친 래틀은 2002년 아바도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 수석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정식 취임했다.

래틀은 21세기의 지휘자였다. 카라얀 이후 아바도를 거치면서 사회 전반에 클래식 음악의 상업적인 영향력이 약해졌을 무렵 베를린 필에 취임했다. 래틀은 베를린 필이라는 거함의 방향타를 이리저리 돌려 다각도의 항로를 모색했다. 먼저 젊은 청중과 음악인 양성에 팔을 걷어붙였다. ‘베를린 필의 미래: Zukunft@BPhil’라는 타이틀로 다양한 계층과 세대를 아우르는 교육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음악이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란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예술교육 프로젝트 ‘리듬 이즈 잇(Rhythm is it!)’을 공동 기획했다. 클래식 음악과 무용 경험이 전무한 학생 250명을 모아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에 맞춰 무용을 완성하는 등 다채롭고 기발한 프로젝트였다.

래틀의 시선은 언제나 미래로 향했다. 2008년 악단의 모든 공연을 온라인 공연실황중계로 담아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는 ‘디지털 콘서트홀’ 시스템을 구축했다. 내부적으로는 오케스트라의 개별 재단을 설립하여 시대에 부응하는 자생 능력을 도모했다. 래틀의 노력들로 1882년 창립된 베를린 필하모닉은 급변하는 클래식 음악계의 한가운데서 21세기의 오케스트라로 업그레이드될 수 있었다.

취임 후 래틀은 베를린 필의 전통적 레퍼토리인 말러·브루크너·브람스·베토벤에서 탈피하고 초기 음악·프랑스 음악·현대음악·재즈를 도입했다. 베를린 필의 지평은 점점 넓어졌지만, 푸르트뱅글러·카라얀·아바도로 이어지던 베를린 필 고유의 색채가 변할 것이란 애호가들의 우려가 드리우고 있었다. 이후 래틀은 브람스 교향곡과 브루크너 교향곡 등 전통 레퍼토리 해석에서 새로운 발전을 이뤄내며 그러한 걱정을 얼마간 불식시켰다. 다른 한 편으로 래틀은 고음악 오케스트라인 ‘계몽시대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며 연주 목록을 확장했다. 이제 베를린 시대를 마감한 래틀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로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글 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음악 칼럼니스트) 

[출처] 월간 객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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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객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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