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가 사는 법ㅣ롱보더 이주애

 

 

자유로운 롱보더의 '슬기로운' 취미 생활

 

롱보더 이주애



2년 전 한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온 영상 속 여인은 춤추는 한 마리 나비 같았다. 벚꽃 잎이 흩날리는 강변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롱보드 위에서 사뿐사뿐 발을 내딛는 모습은 여태껏 보지 못한 우아한 보딩이었다. 영상은 순식간에 4만 여회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빠르게 퍼져나갔다.

“초등학교 방과 후 미술교사로 일할 때라 보드는 취미였어요. 여의도에 놀러 갔다가 재미 삼아 찍은 영상이 하루아침에 유명인이 되는 행운을 가져다주다니, 역시 뭐든지 즐기고 봐야 한다니까요.”

예측 불가능해서 사는 게 재미있다는 듯 말하는 롱보더 이주애(32)는 봄날의 보딩 영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스포츠 모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이후 국내외를 넘나들며 유명 패션브랜드의 홍보영상과 뮤직비디오, TV CF에 롱보드 모델로 출연 중인 그녀의 일상은 바퀴 달린 보드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일과 여가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이 이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각광받는 요즘, 레포츠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졌다. 어디서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롱보드가 이색 취미로 떠오르면서 유명해진 보더들도 많다. 그중 이주애가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된 이유는 누구나 한번쯤 따라해보고 싶게 만드는 쉬우면서도 예쁜 자세에 있다. 그녀는 보드 위에서 높이 점프했다가 착지하거나 발로 보드를 공중에 띄워 손으로 잡는 등 화려한 기술에 집착하지 않는다. 양팔을 자연스럽게 뻗고 가볍게 발을 옮기며 오로지 속도와 지면의 굴곡을 느끼는 데만 집중한다.

“저는 멈추지 않고 달리는 것이 좋아요. 남들은 한 달이면 마스터하는 기초 스텝을 1년 연습한 것도 달리는 보드 위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이에요. 예쁜 자세를 연구하느라 시간이 걸린 이유도 있지만 기술을 배우고 싶은 마음도 없었어요. 바람을 맞으면서 땅의 질감을 충분히 느껴야 몸이 에너지로 가득 충전되는 것 같거든요.”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로움은 그녀로 하여금 너른 땅을 두고 119센티미터 길이의 나무판자 위에 자꾸 서게 만든다. 그녀가 자유와 젊음을 상징하는 레포츠인 롱보드를 처음 접한 건 4년 전이다.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사업가인 아버지 밑에서 어려움 없이 생활하며 미술 교사가 되기 위해 숙명여대 회화과에 입학할 때까지 평탄한 삶을 살았던 그녀. 특별한 취미는 없더라도 부모님에게 걱정 끼치지 않고 착실히 미래를 준비하는 보람을 낙으로 삼으며 지냈다.

그러다 아버지의 사업에 문제가 생겨 가세가 기울었던 건 대학 졸업 후 초등학교 계약직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때였다. 살면서 처음 겪는 변고는 그녀를 무력감에 빠뜨렸다. 경제적인 어려움과는 무관했다. 그렇지 않아도 남자친구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 이별의 아픔을 겪고 있는 와중에 집안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허탈함까지 더해지자 자신이 쓸모없게 여겨졌다. 무엇보다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장래를 준비해왔지만 고난을 이겨낼 힘은 기르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장 허무했다.


 

 

답답함을 달래러 잠깐 바람 쐬러 나간 한강공원에서 평생의 활력소를 발견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자유자재로 롱보드를 다루며 즐기고 있는 이름 모를 청년들을 바라보는 동안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딱 한 가지였다. ‘해야 하는 일뿐 아니라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저들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 겁도 많고 운동신경도 없는 그녀가 그 자리에서 롱보드 동호회 ‘반스크루’의 문을 두드린 까닭은 지금과 다르게 살고 싶은 바람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죽을 것처럼 사랑했던 사람도 떠날 수 있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가족도 흔들릴 수 있다는 걸 알아버린 후로 가치관이 바뀌었어요.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내가 즐거운 일을 찾아 그걸 하면서 살자 결심했죠. 막상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모험 삼아 시작한 게 보드였어요.”


다행히 롱보드는 온실 속 화초 같던 그녀에게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스릴과 쾌감을 만끽하며 그녀는 네 바퀴로 달리는 재미에 깊이 빠져들었다. 연습 모습을 찍은 동영상들이 SNS에서 인기를 끌며 모델료를 받고 상업영상을 촬영할 기회도 얻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으니 금상첨화였지만 그녀는 미술교사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모델 수입이 들쑥날쑥했던 터라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취미 활동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촬영 스케줄이 점점 늘어나 고정 수입이 교사 월급보다 높아지고 나서야 그녀는 롱보더 모델로 전향했다. 정식 미술교사가 되기까지 한 발 앞둔 시점에서 다른 길을 택한 만큼 새로운 삶을 야무지게 꾸려갈 자신이 있었다.

 

 

 

롱보더 이주애는 한마디로 ‘노는 여자’다. 놀면서 가치관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잘’ 노는 여자. 노는 시간을 유익하게 만드는 그녀의 비결은 생활 기반을 탄탄하게 다지려는 노력을 병행하는 것이다. 아무런 대책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취미에만 빠져 지내는 일상은 그녀가 추구하는 삶이 아니다.

“취미 활동에 필요하다고 가족에게 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취미는 내 삶에 대한 책임감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해요. 삶이 불안한데 어떻게 여가를 온전히 즐길 수 있겠어요”라고 강조하는 그녀는 책임감과 즐거움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인생이란 보드를 부드럽게 끌고 가고 있다.

그녀는 가능한 한 많은 경험을 하면서 살 생각이다. 고난을 통해 롱보드를 만나고, 보딩하며 생긴 도전 정신으로 또 다른 취미를 만들어 지금의 행복에 다다른 그녀는 세상에 불필요한 경험은 한 가지도 없다고 확신한다. 롱보드 타기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하고 싶은 경험. 보드에 올라 흰 머리를 날리며 유유히 도로를 달리는 할머니의 일상도 활기찬 에너지로 가득할 것 같다.


한재원 기자 | 사진 최순호 

[출처]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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