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을 거닐다 l 전남 담양 정송강 유적

 

 

 

계절도, 그리움도 詩가 되는 자리

전남 담양 정송강 유적

 

 

 

“위대한 시인은 종이가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 위에 시를 쓴다. 이 곳 식영정 마루턱에 서면 바람도 옛 운율로 불고 냇물도 푸른 글씨가 되어 흐르나니, 우리는 지금 풀 한포기 흙 한줌에서 송강의 가사 성산별곡을 온몸으로 읽는다.”

 

 

 

이토록 멋진 비문이 또 있을까. 한 편의 시를 연상케 하는 글귀가 식영정 아래 돌기둥에 새겨져 있다. 1991년 2월 ‘송강 정철의 달’이 제정된 것을 기념하여 두 곳에 세워졌다는 ‘송강 정철 가사의 터’ 표석.

 

하나는 <관동별곡>의 배경이 된 삼척 죽서루, 다른 하나는 <성산별곡>이 지어진 담양 식영정에 자리하게 되었다. 삼척에는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그의 발길이 자연스레 닿았을 터인데 담양에는 어인 일이었을까.

 

1552년, 잇따른 사화에 휘말려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정철은 가족과 함께 조부의 묘가 있는 담양으로 내려온다. 이때 그의 나이 열여섯살, 이후 27세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갈 때까지 11년간 이곳에서 지내게 된다.

 

당시 담양에는 경관이 빼어난 누각과 정자에서 풍류를 즐기는 누정문학이 성황이었다. 대표적으로 식영정(息影亭)을 들 수 있다. ‘그림자도 쉬고 있는 정자’라는 이름답게 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이곳에서 쉬어가며 시를 읊었다. 송강 정철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정철은 이곳을 드나들며 선비들과 교우하는 한편 뒷산 성산의 경치를 노래하는 <성산별곡>을 짓는다.

 

‘어떤 길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낫게 여겨/ 적막 산중에 들고 아니 나오신가.’

 

 

 


l 1976년 댐이 건설되며 식영정 앞을 흐르던 여울은 푸른 호수가 되었다.



세상에 나서지 않는 식영정 주인의 지조를 칭송하며 시는 시작된다. 식영정 주인은 정철의 벗이었던 서하 김성원이다. 그는 장인이자 스승인 임억령을 위해 식영정을 짓고 자신은 그 아래 서하당에 기거했다. 엄밀히 말해 식영정 일원은 송강 정철 가사의 터이기 전에 김성원과 임억령의 공간인 셈이다.

 

그러나 식영정 마루턱에서 <성산별곡>을 비롯해 <식영정잡영 십수> <하당야좌> <서하당 잡영 사수> 등 수많은 한시와 단가를 지은 정철의 이름이 짙게 남아 있다.

 

식영정으로 향하기 전, 김성원의 거처였던 서하당부터 들러본다. 그 옛날 식영정 손님들을 넉넉하게 맞이하던 김성원처럼 정갈한 누각이 아늑한 기품으로 반겨주는 듯하다. 경내의 나무들에는 계절이 잔뜩 물들어 있다. 빨강 단풍, 노란 은행잎, 초록 댓잎까지 다채로운 색감이 풍광을 가득 채우며 늦가을의 정취를 더해준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이 서하당 지붕 위에도, 연못 위에도, 길손의 어깨 위에도 쌓여간다.

 

이윽고 언덕에 자리한 식영정에 오르기 위해 돌계단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좀 전의 풍경은 점점 멀어지고, 송림에 가려졌던 정자가 조금씩 정체를 드러낸다. 드디어 만난 식영정, 그러나 정면 2칸 측면 2칸 팔각집은 맞은편을 향한 채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수백 년 전 이곳에 올랐다면 그 또한 뒷모습을 보이며 시를 읊고 있었겠지….’

 

정철이 눈에 담았을 경치는 어땠을까. 마루에 앉아 주변을 둘러본다. 하지만 <성산별곡>에 나오는 자미탄, 석병풍, 조대, 용소, 석경 등은 사라졌거나 옛 모습을 잃어버린 후다. 대신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고, 아스팔트 도로가 지나고 있다. 1976년 광주호가 축조되고, 1981년 도로확장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이 일대의 지형이 크게 변한 탓이다.

 

큰 부침 속에서도 뒤편에 자리한 장송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둘레가 한아름이 넘는 소나무는 여전히 꼿꼿하게 서서 세월을 관망하는 중이다.
 

 

 

l 오랜 시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식영정의 장송



오래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는 노송은 정철의 어린 시절도 기억하고 있을까. 지척에서 공부하던 소년을 보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식영정 맞은편에는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가 후학을 양성하던 환벽당(環碧堂)이 있다. 이곳에서 유년 시절의 정철은 벼슬에 나아가기 위해 배움에 힘쓴다.

이 일대가 소나무와 대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푸르름이 고리를 두른다’는 이름이 붙었다지만 제자들이 청
운(靑雲)의 꿈을 이루기 바라는 스승의 염원도 담았으리라.

 

김윤제와 정철의 만남에는 전설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김윤제는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다가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놀고 있는 꿈을 꾼다. 너무나 꿈이 생생하여 잠에서 깨 용소로 가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그가 바로 정철이었다.

 

어머니와 순천에 사는 둘째형을 만나러 가는 길에 더위를 식히고 있던 중이었다. 김윤제는 정철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였고 곧 비범함을 알아보고 자기 밑에서 공부를 가르친다.

 

 


l 식영정에 걸려 있는 편액 중 하나인 정민하의 ‘가은노부’



이때 환벽당에서 동문수학하던 이가 식영정 주인 김성원이었다. 정철은 학문에 정진하는 와중에도 가끔은 뜰 안을 거닐며 머리를 식히지 않았을까. 축대 위에 지어진 환벽당에서는 넓은 정원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느티나무, 배롱나무, 벽오동나무 등이 어우러진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모과나무는 노랗게 익은 열매를 바닥에 한가득 떨구고 있다. 하나를 주워 코에 갖다 대니 달콤한 향이 풍겨온다. 잠깐이지만 진한 모과향은 쉬이 가시지 않고 차로 10여분 거리인 송강정까지 따라온다.

 

정철은 27세에 벼슬길에 올라 상경했지만 혼란스러운 정국에 네 번이나 낙향을 반복한다. 송강정은 그의 나이 50세 되던 1585년, 네 번째 낙향했을 때 4년간 머무르던 곳이다. 임금의 총애를 잃고 은둔하다시피 내려온 그의 초가가 있던 언덕은 당시만 해도 한갓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4차선 대로가 지나고 큰 식당도 들어서 자동차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정철은 이 자리에 초가를 짓고 죽록정이라 불렀다. 앞에 흐르는 죽록천에서 빌린 것이다. 이 강의 또 다른 이름은 송강(松江). 그의 호도 여기서 따왔다. 

 

 

l 환벽당 담장 위에 내려앉은 모과



지금의 송강정은 후손들이 정철을 기리기 위하여 죽록정을 중수하여 세운 것이다. 그래서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송강정 우측에는 ‘죽록정(竹綠亭)’, 정면에는 ‘송강정(松江亭)’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철은 초막에 머물며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썼다. 두 시 모두 여인의 목소리를 빌려 임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향기로운 매화, 맑은 달빛, 따뜻한 봄기운까지 보내주고 싶은 임…. 그토록 그리워하던 임은 어디 계셨을까.

 

궁이 있던 서울 방향을 가늠해본다. 정철의 두 눈, 두 귀, 그리고 온 마음은 매일 그리로 향했을 것이다. 그를 따라 나도 고개를 돌린다. 시인을 좇는 일은 그가 두 발디딘 자리가 아니라 시선을 향해야 하는 법이니까….

 

 

글 김윤미 기자 | 사진 최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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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과 담양

정철은 어린 시절을 비롯하여 벼슬길에 올라서도 네 번이나 낙향하여 담양에 머물렀다. 담양은 정철의 문학적 산실이었다. <성산별곡>을 지은 식영정과 <사미인곡>이 탄생한 송강정, 그가 학문을 닦던 환벽당을 묶어 정송강 유적이라 부른다.

 

[출처]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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