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Road] 남극을 상상한다 / 이원영, 극지연구소 선임 연구원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타임스 스퀘어에선 매년 새해를 맞이하는 행사가 열린다. 카운트다운을 외치기 직전에 틀어주는 노래가 있는데, 바로 이매진(Imagine)’이다. 수많은 인파가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며 1971년의 존 레논(John Lennon)이 꿈꿨던 세상을 되새긴다. 그리고 여전히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 다른 전쟁, 테러, 폭력에 마음 아파하며 평화를 기원한다.

나 역시 뉴욕에서 카운트다운 장면을 보며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있다. 노래 가사 속 세상을 그저 꿈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노래 속의 상상과 닮아 있는 곳을 알고 있고, 매년 겨울이 되면 그곳에 간다.

 

나라가 없다고 상상해봐(Imagine there’s no countries)’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따뜻한 남반구의 여름이 오면 펭귄들은 번식을 위해 남극을 찾는다. 그러면 나도 같이 펭귄을 따라 남극 세종기지로 날아가 연구를 시작한다. 내 전공 분야는 동물행동학이기 때문에 펭귄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 주된 일이다. 예를 들면, 어디에 가서 무얼 먹는지, 혼자 다니는지 아니면 같이 다니는지, 새끼를 어떻게 키우는지 조사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펭귄 번식지에서 내내 그들을 관찰한다. 남극에 가면 좋아하는 펭귄을 지겹도록 볼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펭귄을 빼고 얘기하더라도 남극엔 특별한 것이 있다.

남극은 지구상 어느 국가에도 속해 있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 195912개 국가들이 모여서 남극에서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은 채 군사 행동을 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이용하자고 약속했다. 남극행 비행기에서 내리면, 즉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근엄한 표정으로 여권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는 출입국 사무소 직원도 없다. 남극을 다녀오면 여권에 기록이 남지 않는다. 내 여권 속엔 세종기지에서 만든 펭귄 도장이 남겨져 있지만, 그저 재미로 찍은 것이지 공식 기록용은 아니다.

남극은 과학적인 조사만 허용된 연구자들의 땅이다. 괴짜 혹은 너드(nerd)라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런 괴짜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하루 종일 과학 연구에만 몰두하는 곳이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고 상상해봐(Imagine there’s no possessions)’

남극 기지에선 돈이 필요 없다. 일 년 치 식량을 커다란 컨테이너에 실어 넉넉히 운반해온다. 음식은 먹고 싶은 만큼 먹을 수 있다. 간혹 과자나 라면 같은 음식에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을 보기도 하지만, 어차피 혼자 먹을 수 있는 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음식엔 유통기한이 있어서 혼자 쌓아두고 먹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갑을 어디에 둔지 기억나지 않아도 걱정이 없다. 신용카드나 운전면허증을 꺼낼 일이 없다. 지갑이 없어지면 누가 훔쳐갔나하는 의심이 들지 않는다. 남극에서 나갈 때쯤 방 청소를 하다 보면 어디선가 다시 나온다.

전화기가 없어져도 걱정이 없다. 어디서 전화가 올 일도 없고, 전화를 걸 일도 없다. 휴대전화는 그저 사진 찍는 용도로 쓰일 뿐이다. 나는 평소 휴대전화 중독이라는 지적을 받을 만큼 전화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늘 눈앞에 전화기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했지만 남극에선 중독 증상이 금방 사라졌다. 너무 걱정 없이 지내다가 세탁기에 넣고 돌린 적도 있다.

남극에선 물자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돕고 가진 걸 나누는 행위가 당연하다. 아무런 대가 없이 먹을거리를 나누고 방한용품을 서로 빌려준다.

남극에서 지나다가 한국에 돌아오면 한동안 적응에 애를 먹는다. 비단 시차 때문만은 아니다. 가끔 세상이 남극 기지처럼 바뀌면 얼마나 좋을까 머릿속으로 상상한다. 날 몽상가라고 부를지도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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