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후의 그림카페] 시간을 머금은 그림 / 이나진, 화가



2011311일 도쿄 맑음. 커피 향기를 맡으며 작지만 멋스러운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화분의 잎사귀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커피가 놓인 테이블이 흔들리고, 쇼윈도의 유리가 파도치듯 흔들렸다. 카페 할아버지 사장님 안내를 받아 밖으로 나왔다. 밖은 이미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대피하고 있었다. 멀리서 남편이 뛰어왔다. 남편은 내 손목을 잡고 도로 중간으로 달려갔고, 순간 뒤를 돌아보니 도로 아스팔트는 파도를 치며 나에게 밀려오고 있었다. 이것이 첫 지진 경험이다. 동일본 대지진.

일본 사람들의 반응은 무척 침착하고 담담했다. 반복해서 오는 여진이 두려웠지만, 그들처럼 이곳을 떠나지 않고 극복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그림일기 쓰기. 그림일기는 아이를 출산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딸의 존재는 내 그림에 큰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엄마가 되었지만, 어른이란 무엇인지를 되짚어 생각해 보는 시간들이 늘어났다. 어릴 적에는 내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지만, 자라면서 나는 세상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알게 된 두려움과 긴장들이 아기동물 그림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신의 어렸을 때는 어떠했나요? 당신의 지금 모습은 어떻게 변해서 만들어졌나요? 당신은 미래 모습을 상상하나요? 나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내 어릴 적 영국 케임브리지에서의 삶과 딸의 일본 도쿄에서의 삶은 겹쳐져 있다. 버킹엄 궁전 앞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행진을 기다리거나 친구들과 골목을 뛰어다녔다. 친구들과 유령 이야기를 나누었고,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여러 종류의 이끼를 키우기도 했다. 딸 역시 도쿄에서 흙이 많은 놀이터에서 모래 놀이를 하고, 돌멩이를 수집했다. 시간을 머금은 공간에서 아이의 내면이 커가고 있다. 바깥세상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힘껏 문을 열어 한발 한발 내딛는 아이가 여기 있다.

(그림1)의 아기동물은 어린 시절의 당신일 수도 있고, 지금의 당신이 될 수도 있다. 아기동물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관과 목걸이가 무거운 모양이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그림1)의 제목은 <고마워! 나를 키운 꽃과 바람아!>이다. ‘은 웃음을 주었고, 바람에 눈물을 맡겨 보냈다. 우리는 울고 웃으며 지금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홍콩의 우산 혁명이 일어난 날 한 컬렉터에게 판매되었다. 혁명이 일어나는 날 컬렉터는 이 작품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궁금해진다. 작품을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서 보세요. (그림2) 하나의 작품은 화가가 시간을 축적한 결과물이다. 1분이라도 더 내 작품을 감상하고 공감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에서 정성을 다하고 있다.

아기동물 시리즈는 물감을 직접 만들어 튜브에 넣어서 짜는 스퀴징 기법(Squeezing Technique)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감의 반짝임과 그 선의 두께에 의해 반사, 그림자 등이 나타난다. 우리의 하루하루처럼 벽에 걸린 아기동물도 새벽부터 한낮을 걸쳐 석양, 밤에 이르기까지 하루 종일 색과 느낌이 변화한다. 아기동물은 낯익은 얼굴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아기동물 앞에 서면, 그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다음으로 흰 배경이 보인다. 흰 배경 속엔 그림들이 숨어 있다. 작품을 멀리서 보다가 가까이 다가가면 흰색으로만 보였던 배경에 꽃을 한가득 안고 있는 작은 천사들, 오페라 극장의 음악가들과 발코니석의 관람객, 작은 장난감 수집함, 숲속에 숨어 있는 토끼 등을 발견할 수 있다. 멀리서 볼 때엔 흰색의 미묘한 반짝거림과 요철에 의한 그림자가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보이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드러난다. 굳은 표정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어른들에게 숨은 이야기들로 살포시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하고 싶다.

나는 작업을 할 때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관객들도 가끔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여유를 가지면서 미소 짓는 하루가 되길 바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장식적이지만, 최소한의 장식으로어느 음악가의 바이올린 현의 팽팽함 같이 기분 좋은 긴장을 유지하며.’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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