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人터뷰] 디자인, 책의 전통과 정통을 담다 / 정병규, 북디자이너

사람에게 인격이 있다면 책에는 책격(冊格)이 있어요. 북디자인은 그 고유한 책격을 갖게 하는 일이에요.” 책에 격을 입히고 숨을 불어넣으며 비로소 존재하게 만드는 대한민국 1세대 북디자이너정병규(73). 그저 책이 좋아서시작한 북디자인은 40년의 세월 동안 침식과 퇴적을 반복하며 아름다운 책 문화의 지형을 형성해왔다. 인문학적 지식을 근간으로 새로운 북디자인의 지평을 넓혀온 그가 이룬 일가지언은 일책일자(一冊一字)’, 즉 하나의 내용에는 그에 어울리는 고유한 글자꼴이 있다는 지론이다. 한결같이 문화로서의 책을 강조하며 책의 전통과 정통을 지켜온 그를 서울 모처에서 만나보았다. 한 권의 책으로 펼쳐진 그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거목, 생각의 빗장을 열고 마주한 시간의 얼굴이었다. 

좋은 책, 좋은 디자인

시대마다 출판 산업의 불황을 말해왔지만, 중요한 건 출판 산업과 책 문화를 분리하고 확장하는 거예요. 인간의 문명과 문화는 새로운 책의 가치를 어떻게 자리매김하느냐에 달려있거든요. 그러려면 책에 대한 예의, 격을 살려주는 좋은 책을 만드는 게 기본이죠. 저는 내용에 중점을 둔 양서(良書)라는 말보다 좋은 책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좋은 책이란 주인이 많은 책을 말해요. 디자이너, 교정자, 인쇄공, 제본자 등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존중받으며 책을 만드는 게 곧 독자를 존중하는 길이에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책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급기야 책의 종말까지 거론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현상은 그의 말대로 자본주의 시대가 만들어낸 변환기의 제스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날로그는 디지털 시대의 생태계에 적응하기 위한 자생력의 원천을 디지털과 공존하며 상생하는 방향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장점이 만나는 시대에도 책의 가치는 물질성과 촉각성에 있는 것은 아닐까.

현시대는 활자문화와 책, 문자의 고마움을 새삼 깨닫게 해줬어요. e-Book과 종이책에는 둘 다 ‘Book’이라는 말이 붙지만 분명 같은 면과 다른 면이 있죠. 2+3=5라는 결론은 같아도 각기 환경은 달라요. 책과 그것의 수용자, 즉 사람 사이에는 이 있잖아요. e-Book은 책의 물질성과 손의 촉각성이 만나는 세계를 대체할 수 없어요. 책은 인간의 사유와 상상력의 외형이자 제도이고, 디자인은 인간 삶의 지혜의 현장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죠.”

책은 인간의 길을 인간은 책의 길을 따르며 진일보해왔다. 시대의 가치와 흐름에 순행하기도 하고, 또 역행하기도 하면서. 여기서 삶의 큰 바다로서의 을 재인식하는 것은 새로운 문명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책과 디자인의 지도를 어떻게 그려나가야 할까.

구조주의자 소쉬르는 빨간색, 노란색, 까만색 글자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새로운 언어학이라고 했는데, 이게 곧 인문학이에요. 하지만 디자인은 차이를 바탕으로 해야 하죠. 저는 동명사로서의 디자인을 말해왔는데, 디자인은 물건을 만드는 명사가 아니라 그것을 시대의 문화와 역사 속에 살아있게 만드는 동사라는 거예요.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에요. 멋보다는 맛이죠. 앞으로는 새로운 상생의 시대에 맞게 모든 것들이 맞춰져야 해요. 성장과 분배, 삶의 원리와 균형 모두 다.” 

한글, 디자인으로서의 완성

한국 디자인의 원형을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발견했다는 그는 한글이란 무엇인가에 천착하기 위해 상당히 오랫동안 공부하며 마의 산을 오르고 있다. 한글을 다뤄온 한국의 디자이너로서 서양의 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넘어 새로운 디자인을 논하려면 한국적으로 접근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 한글을 디자인의 완성으로 삼은 것.

“20세기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연속과 불연속의 문제예요. 놀랍게도 해례본에서는 한글의 연속성을 이미 말하고 있죠. 세종대왕의 철학과 문자관은 한글을 통해 발현됐는데, 인류 역사상 새로운 세계예요. 이를 알게 된 이상 어쩌면 좋아요, 모른 척하면 안 되잖아요. 단순히 한글의 과학성을 알고 있다는 단계를 뛰어넘어 훈민정음으로 돌아가한글의 시각적 특성을 탐구해야죠. 우리 모두는 세계 문자사()에 이를 공표할 의무가 있어요.”

지치지 않고 새로운 일을 계획하며 실천한 그를 두고 친한 벗이었던 고() 이윤기 선생은 계획가(Planner)’라고 불렀다고 한다. 문화생산자이자 계획가인 그가 40년간 디자인한 책들은 대표 초기작인 한수산의 <부초 浮草>(민음사, 1977)를 비롯해 대략 3,000여 종. 그런데 그는 그동안 산발적으로 흩어진 책들을 최근에야 모으기 시작했고, 현재 1,600여 종이 서재의 안뜰로 돌아왔다. “자전거 페달만 밟다가 뒤를 챙기지 못했다고 한 그는 여전히 현역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기다림의 디자인, ‘좋은디자인을 내놓을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좋은 디자인은 전체적으로 A의 느낌을 만들어내는 쪽으로 디자인의 모든 것들이 모이면서 그 느낌을 풍기는 건데, 메시지와는 달라요. 무엇보다 자기 마음에 들어야 하고, 기회가 올 때 가시화할 수 있게 기다림의 디자인을 갖고 있어야죠. 좋은 디자인의 기본 명제는 유행을 넘어선 시대의 가치를 고민하는 거예요. 좋은 시와 소설에도 시대적 가치와 본질, 지향점이 잘 녹아 있잖아요. 지금 각자 하는 것은 소문자 디자인인데, 시대의 디자인, 삶의 철학이 담긴, 넓게는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의 질문과 대답이 들어있는 대문자 디자인으로 가야 해요.”

올바른 책 문화를 위해 끊임없이 문제 제기하며 철학적 담론을 제시해온 그였지만, 50대 이후로는 책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정체기가 찾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손(Hand), 머리(Head), 마음(Heart), 이른바 3H를 기조로 한 디자인 문법과 언어로 시간을 견디며 세상과 소통해왔다. 이제는 나이 때문에 건강(Health)도 추가해서 4H”라며 호탕하게 웃던 그는 책이 있기에 여전히 청춘이다. 그 청춘의 페달은 오늘도 멈추지 않는다.

. 사진 김신영 편집장

사진1: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 전시된 정병규 컬렉션

사진2: <행복한 책읽기: 김현 일기 1986-1989> 개정특별판(2015)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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