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풍경]따뜻한 봄날을 기다리며 / 김동환, 대안금융경제연구소 소장

요즘 같은 봄날이면 어렴풋이 30대 초반 1년간 머물렀던 아일랜드의 더블린이 떠오른다. 우리에겐 그저 영국 옆에 붙은 섬나라이며 술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유명한 흑맥주 기네스의 고향 정도로 알려져 있는 나라이고 음악 영화 <원스 Once>의 배경이 된 도시가 아일랜드의 수도이자 최대의 도시 더블린이다.

IMF가 한창이던 1998, 유학을 끝내고 운 좋게 영국 현지 금융회사에취직이 된 나는 이 더블린이란 도시에 배치되어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백일이 갓 지난 딸과 아내를 데리고 생면부지의 도시로 온갖 살림살이를 옮기고 집을 구한다는 건 짧은 유학 생활이 해외 경험의 전부인 나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때 도움을 준 로저(Roger Gooch)라는 영국 사람의 기억을 되살려보려 한다.

로저는 유학 초기에 모자란 영어를 보충하기 위해 구한 개인교사였다. 말이 개인교사지 그래 봐야 한 시간에 5파운드 정도의 수업료를 지불했으니 돈을 목적으로 한 건 아니고, 아마 동양에서 온 이방인과의 만남도 흥미롭거니와 어쩌면 한가한 은퇴 생활의 활력소 같은 것이었으리라. 내가 다니던 대학 병원의 직원이었다는 그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영국 남자의 인상이었다. 일주일에 두 시간의 수업이 계속되었는데, 그때마다 만삭인 아내가 차와 비스킷을 내와도 그저 짧게 고맙다는 말만 건네고, 시간이 되면 정확히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는, 어쩌면 조금은 차가운 느낌의 중년 남자였다.

그런 만남이 두어 달 흘렀을까? 수업을 마치고 일어서던 그가 대뜸 주말에 뭘 하냐고 묻는 게 아닌가. 당시에는 가난한 유학생 신분으로 차가 없던 탓에 우리 부부는 그저 학교에 가서 책을 읽고, 가끔 한국 유학생들과 식사를 하는 게 주말 일정의 전부였다. 우리 사정을 알았던지 그는 가고 싶은 곳을 정해서 자기 차로 함께 여행하자는 제안을 했고, 우리는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평상시 가보고 싶었던 옥스퍼드를 함께 간 기억이 난다.

어느 화창한 봄날, 로저는 평소에 몰던 낡은 차가 아닌 날렵한 새 차에 우리 부부를 태우고 옥스퍼드로 향했다. 그는 옥스퍼드까지 가는 길 곳곳의 볼거리를 들러서 설명해줬고, 우리는 준비해 간 김밥과 샌드위치를 함께 나눠 먹으며 옥스퍼드 대학과 시내의 전경을 둘러봤는데,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우리는 아주 조금씩 친해졌다. 하지만 그와는 나이 차이도 많았고 매우 내성적인 성격이었기에 친구라기보다는 그저 좋은 영국 아저씨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리가 더블린으로 이사를 가게 된 사정을 듣고 선뜻 자신의 차에 짐차를 달아 같이 가주겠다는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더블린까지 차를 몰아서 가려면 다섯 시간 넘게 달려 웨일스까지 간 뒤 거기서 또 배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더블린에 도착해서도 살 집을 구하기 위해 다녀야 하는 매우 힘들고 성가신 일이었을 텐데 말이다. 반가운 마음에 고맙다고는 했지만 나는 이내 얼마를 지불해야 하나 생각하게 됐고, 주위의 한국 분들도 하나같이 조심하라며 공짜로 그런 수고를 할 사람이 어디 있으며 자칫 바가지를 쓸 수도 있으니 명확하게 수고비를 정하고 하라는 조언을 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그는 일체의 수고비도 받지 않았고, 더블린에 도착해서도 고마운 마음에 호텔에 묵자는 나의 제안을 물리치며 하룻밤에 8파운드짜리 유스호스텔을 고집했다. 집을 구하는 과정에서도 보증인으로서 해야 할 서명을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해주었다. 그의 수고 덕에 어렵사리 집을 구하고 가져간 살림살이를 어느 정도 옮겨놓은 후에야 간단한 저녁을 나눌 수 있었다. 함께 식사를 한 뒤 돌아가는 로저를 바라보며 나는 그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방인으로부터의 따뜻한 선의를 느꼈다.

그렇게 로저의 도움으로 우리는 더블린에서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후 로저는 한 번 더 그가 구해준 우리 집을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우연찮게 엿듣게 그의 아내와의 통화를 통해 당시 그가 백혈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더블린으로 오던 날 계속된 통화에서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어색하게 전화를 끊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의 아내는 환자가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냐고 화를 냈을 것이다.

지금도 20년 전 로저와 함께했던 더블린 여행이 아스라이 기억난다. 가난했던 시절 우리 세 가족의 추억이 서린 유럽의 한편, 더블린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우리의 어린 딸을 안고 찍은 그의 사진을 꺼내보며 아내는 매번 천사의 얼굴을 떠올린다고 한다.

봄이 돌아왔다. 살기가 팍팍하다고 한다. 경제가 힘들어져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성이 나있는 듯하다. 여간해선 선의가 통하지 않고 왜곡되는 시대라 아직 겨울을 느낀다. 사랑과 선의가 제대로 흘러넘치는 진정한 봄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해본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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