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류와의 만남 / 이상희, 고인류학자·UC리버사이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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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은 그저 그랬다. 처음 보는 순간 반하여 평생에 걸쳐 계속될 열정을 느끼지도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고인류학이라는 이름조차 몰랐다. 흔히 그렇듯, 나 역시 인류의 진화는 고등학교 생물 교과서 끝부분에 덤처럼 등장해서 외워야 하는 내용이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호모하빌리스호모에렉투스네안데르탈인크로마뇽인. 대학입시 시험에 출제될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에 집중해서 공부하지도 않았다.

대학교 학부 시절에 리처드 리키(Richard Leakey)와 로저 레윈(Roger Lewin)이 쓴 책 <Origins>(‘인류의 기원으로 번역)를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고인류학은 단순 암기과목이 아니었다. 머나먼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인간성의 시작은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는 괴물의 모습이 아니라 협동과 양보를 통한 인간미 넘치는 원시인의 모습이었다. 화석에서 정보를 얻어내어 인간성의 근원에 대한 탐구를 과학적으로 할 수 있다는 점은 매력이었다.

 

_ 열정, 이별, 화해

고고학을 전공한 대학교 학부 과정이 끝나갈 무렵에 찾아온 공부에 대한 회의와 슬럼프에서 뜻하지 않게 빠져나올 기회가 찾아왔다. 마침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유학을 갈 기회가 생겼다. 이때, 이선복 교수님께서 고인류학을 강력히 추천하셨다. 한국에 없는 분야를 공부한다는 긴장과 함께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다는 흥분도 있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집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했다. 나는 집에서 숨 막힘을 느꼈지만, 정면으로 맞서서 싸울만한 그릇도 되지 못했다. 내가 자라나던 시대에 여자가 집을 떠날 수 있는 정당한 이유는 결혼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부모님의 집을 떠나기 위해 어떤 남자와 집을 이루어서 그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고백하건대, 고인류학을 공부하겠다는 이유만으로 유학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고인류학에 대한 열정이 생긴 것은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부터이다. 문과생으로서는 몰랐던 과학적인 접근에 푹 빠졌다. 생소한 분야를 기초부터 공부하는 압박감은 상당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겼다. 고인류 화석을 중심으로 공부하던 대학원 과정을 마치자 이번에는 유전자를 중심으로 인류의 진화를 공부하는 박사후 연구원(Post Doctor) 과정이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교수가 되어서 테뉴어까지 받은 다음 삶을 챙기는 사이 연구의 줄이 끊어지고 말았다. 끊어진 줄은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쏟아부은 젊음은 헛되었다고 생각하고 절망했다.

여러 우연들이 겹쳐서 인류의 진화에 대한 글을 일반 대중을 위해 쓰기 시작했다. 뻔한 내용이 새로운 언어로 다시 태어났다. 나도 다시 태어났다. 나는 고인류학을 다시 만났다. 고인류학은 나를 기다려 주었다.

 

_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30년이 지난 요즘 고인류학이 탄생한 비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쩌면 옛날에도 알고 있었지만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미국 고인류학의 모체인 형질인류학 우생학, 인종차별, 인종혐오와 뗄 수 없는 과거를 가지고 있다. 형질인류학은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서 정면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오로지 순수한 과학적인 접근을 택하면서 과학으로 인정받는 일에 힘썼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형질인류학에서 중요하게 여겨온 객관적인 자료는 소외 계층에서 빼앗아온 몸과 뼈와 피에서 왔다. 미국 형질인류학계에서는 객관적이고 건조한 자료가 절대로 객관적이고 건조하지 않다는 점, 그 자료 속에 담겨있는 정치 경제와 억압에 대해 다음 세대에게 분명히 가르치기 시작했다.

오래전 머나먼 곳에서 살던 고인류를 연구하는 고인류학 역시 현재의 형질인류학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아마 고인류학 역시 성장통을 겪을 것이다. 이 시기를 지나고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나는 고인류학에서 그동안 지워지고 사라졌던 목소리를 발굴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그동안 인류의 진화 연구에서 그려지는 인류는 유럽인 성인 남성 비장애인이었다. 유럽인이 아닌, 성인이 아닌, 남성이 아닌, 비장애인이 아닌 대다수 인류를 만나기 위해 함께 모험을 떠나는 기분이다.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학사, 미국 미시간대학교 인류학과 석·박사, 일본 소켄다이 박사후 연구원. 저서 <인류의 기원>(2015)<이상희 선생님이 들려주는 인류이야기>(2018), 논문 다수. 캘리포니아리버사이드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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