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그 상상의 공간] 일상이 여행이 되는 순간 / 정승인 , 사진작가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된 여행이었다. 명화 속 장면들이 선명하게 펼쳐질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차 적응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고, 모든 순간이 감동과 희열로 다가왔다. 딱 그대로였다. 어릴 적 책에서 본 명화와 영화의 장면들이 일상의 풍경이었다. 낯선 곳, 낯선 사람.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친근함과 익숙함이 주는 아름다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로 여행을 이어갔다.

 

여행의 하루하루는 꿈을 이룬 듯 기쁨 가득이었고, 두근거리는 마음의 템포도 점점 빨라졌다. 쉼 없는 ‘여행 릴레이’처럼 달리듯 쫓기듯 더 낯선 익숙함을 찾아 여정을 떠났다. 그렇게 여행의 중반에 치달을 때쯤 브레이크가 걸리게 된다. 변덕스러운 날씨로 심한 감기몸살에 걸려 며칠을 숙소에서 앓아눕게 된 것이다. 온갖 잡생각에 혼란스럽고, 도움을 요청할 방법도 없을 때, 숙소 주인이 몇 가지의 약과 함께 건넨 격려 몇 마디가 여행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너의 여행에는 쉼이 필요할 것 같다”는 그녀의 말이 하루 종일 귀에 맴돌았다. 무작정 달려와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얻은 것은 무엇인가 돌이켜보면, ‘정작 내 마음은 없었던 건 아닌가’하는 반문을 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한마디나 의견으로 내 몸과 마음을 혹사시킨 건 아닐까’, ‘이 나라, 이 도시에서는 이런 풍경, 이런 랜드마크를 꼭 봐야 하며’, ‘이곳에서는 이 음식을 꼭 먹어야 하고’, ‘이 시기에는 이곳은 가야 하고’, ‘저곳은 가도 볼 게 없다’, 그리고 ‘이 시간에는 이곳에서 보는 노을이 그 도시의 매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선행자(先行者)들의 여행 이야기들로 가득했던나의 여행을 반성하게 되었다. 

 

단순히 랜드마크를 보기 위해 떠나온 것은 아닌데, 건물 하나, 조각상 하나 만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 왜 이렇게 여행이 변질되었나 싶은 생각에 자책하며 ‘준비하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물음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아니라는 답을 내렸다. 사실 다시 여행을 떠나기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낯선 두려움과 설렘으로 환상 가득 찬 내 모습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한 박자 느리게 보는 여행 법을 배우고 나니 사소한 일상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의 햇살은 어제의 햇살보다 따스했고, 스치는 바람결, 음식 냄새, 새소리와 사람 소리, 모든 것이 행복 그 자체로 느껴졌다. 도시의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역사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고성도, 희대의 명작이라는 건축물도, 화려한 쇼핑센터도 아닌 도시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삶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순간부터 여행은 완전히 바뀌었다. 누군가의 일상 속에 먼저 다가가 환하게 미소 짓는 사람이 되었고, 내 시선을 사진으로 기록하여 선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누군가의 일상은 내 시선으로 기록되어 한 장의 사진으로 전해졌다. 나는 “지금 당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요”라는 말 대신 셔터를 눌러 그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 선물해줬다.

 

사실 여행에는 정답이 없다. 모든 것은 각자의 영역과 자리에서 흘러온 시간 그 자체로도 아름답고 존중돼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선행자들의 말로 이뤄진 나의 여행은 정답이 아니었다. 각자의 마음과 감성을 바탕으로 한 여행이면 충분하다. 대부분 “여행의 아름다운 순간은 카메라에 다 담기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찍는 이유는 시간이 흘러 여행을 추억했을 때 조금 더 선명하게 기억하기 위함은 아닐까? 즉, 여행을 기억하는 매개체로 사진을 선택한 것이다. 또 다른 매개체로는 도시의 햇살, 먹었던 음식과 향신료, 도시가 주는 묘한 냄새 등도 있지만, 사진이야말로 가장 쉽고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사진을 꺼냈을 때, 그날의 온도와 햇살, 그리고 사람들과 에피소드가 모두 새록새록 기억날 것이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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