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과학행정가로 이끈 한 권의 책 / 오세정, 서울대학교 총장

주위에서 친지들이 은퇴하는 나이가 되다 보니, 나도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미국으로 유학 가서 물리학 박사를 받은 후 모교로 돌아와 교수 생활을 32년간 했으니 어찌 보면 굴곡 없고 평범한 인생을 산 셈이다. 물론 그 후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가 2년 남짓 국회의원 생활도 하고, 결국 서울대 총장으로 선임되기도 했으니 보통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평범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도 학자나 전문가로서 일을 하는 것이라서 나로서는 크게 보아 학자로서의 삶을 일관되게 살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전문가로서 계속 일을 했다 하더라도 순수한 학자로서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던 전반기와 학장이나 정부기관 임원으로서 과학행정가의 역할을 했던 후반기로 구분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일생을 물리학자로 살기로 결정한 것도, 그리고 후에 과학행정가로서 변신하게 된 것도 그 계기가 된 만남이 각각 있었다. 사실 대학교 진학할 때 물리학과를 선택한 것은 막연한 과학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물리학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몰랐고, 상대성 이론 등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대학교 3학년 때 양자역학이라는 과목을 만나면서 나는 물리학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양자역학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과학 전반에 대해, 더 나아가 인류가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까지 물리학에서는 뉴턴 역학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인식되고 있었다. 물체에 대한 현재의 조건을 알면 운동방정식에 의해 그 물체의 미래 상태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러한 결정론적인 사고방식은 심지어 인간의 자유의지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뉴턴 역학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20세기 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 의해 산산이 깨지게 된다. 특히 양자역학은 뉴턴역학의 결정론을 부정하고, 물리학에서 예측할 수 있는 것은 결과에 대한 확률 뿐이라는 혁명적인 제안을 한다. 게다가 관측에 의해 물체의 상태가 바뀐다든지, 측정이 가능해야만 의미 있는 물리의 양이라고 할 수 있다든지 하는 보통 상식과는 다른 제안들을 한다. 이처럼 과거의 이론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새로운 생각들이 자유롭게 제시되고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매우 흥미로웠고, 이러한 학문에 일생을 전념하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유학 후 모교로 돌아와 순조로운 물리학 연구 활동을 하면서도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내가 하는 연구가 재미있기는 한데, 과연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하는 점이었다. 물론 인류 지식의 확장에 기여하고, 특히 내 분야의 연구는 실용적인 면도 있었기 때문에 응용 가능성도 있었지만, 상당히 간접적이어서 과연 내가 교수로서 받고 있는 여러 혜택에 대해 충분한 보답이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대학 사회가 민주화 운동 등으로 상당한 소용돌이에 쌓여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때 내 주의를 끈 것이 <부분과 전체>라는 책이었다. 그 이유는 이 책의 저자가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하여 양자역학의 토대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한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 (1901~1976, 193231세의 나이로 노벨물리학상 수상)라는 점도 있고, 또한 이 책을 번역한 분이 해직 교수였던 유명한 고려대학교 김용준 교수였다는 점도 있었다.

이 책은 하이젠베르크의 자서전 비슷한 책이다. 본인이 물리학에 입문한 과정부터 시작하여 교수로서 나치 시대를 견디고 2차 대전 후 독일의 연구소와 학계 재건에 기여하는 과정까지 본인의 생각과 동료들과의 토론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2차 대전 중에 독일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총괄하였다는 의혹을 받기도 한 사람이다. 사실 히틀러가 집권하고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질 때 독일의 많은 물리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하이젠베르크도 동료들로부터 미국으로 가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이를 뿌리치고 독일에 남기로 결정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결정의 이유를 전쟁 후에 독일에서 과학을 재건하고자 하는 젊은이들과 같이 있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또한 사람들은 다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며, 그때까지는 자기가 살고 있는 작은 영역에서 질서를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한다. 이 말은 어두운 시절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에 고민하던 나에게 많은 위안을 주었으며, 후에 과학행정의 길로 나아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현대 사회는 매우 복잡하며, 아무리 지식이 많고 힘이 있어도 한 개인은 사회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전체를 보는 눈이 있으면 결국 사회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제목 <부분과 전체>는 그러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 1953년 서울 출생.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물리학 박사. Xerox Palo Alto 연구소 연구원,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기초과학연구원 초대원장, 20대 비례대표 국회의원 등 역임. 한국과학상(1998), 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자상(2003) 수상. 27대 서울대학교 총장.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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