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메꽃을 담은 글을 만나다 /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무르익을 대로 익은 봄, 오월의 끝자락, 신록이 싱그럽기 그지없다. 올봄도 참으로 눈부시게 흘러가고 있다. 봄 햇살의 따사로움 속에서 다투어 피어나던 잎이며 꽃들이 이제 제법 신록에 초록빛을 더해간다. 자연은 나무와 풀들이 어우러져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자라나고 있지만, 절대로 아무렇게나 아무 곳에서나 자라지 않는다.

자연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은 환경 혹은 다른 생명과의 관계 속에서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도와주며 그렇게 살아간다. 꽃이 달리는 위치나 피어나는 계절조차도 단순히 햇볕의 길이나 기온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오면서 많은 요소의 자연스러운 자연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내 삶의 빛깔도 그러한 듯하다. 식물을 공부하는 사람이고, 국립수목원이라는 아름답고도 의미 있는 직장에서 오랫동안 일해오고 있으며 때로는 지금처럼 식물 이야기를 글로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에 훌륭한 식물학자들은 참으로 많고, 한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들도 여럿이지만, 논문 이외에 부족하더라도 대중적인 글로 식물 이야기를 남기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나의 이러한 조금은 남다른 특색은 내 삶의 색깔을 많이 바꿔놓았다.

어떤 만남에서 시작되었을까. 가장 크게 드러난 변화의 시작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100가지>(현암사)라는 책을 출간하고 나면서부터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지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이 책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장소, 수많은 기회와 만나며 살아간다. 꼬리에 꼬리를 맺은 인연들이 모여 지금의 내 모습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나의 첫 저서인 이 책을 써 내려간 시간은 나 자신에게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적어도 100가지의 나무에 대해 한 꼭지 한 꼭지 완성해가면서 그 나무들과 몸과 마음을 다해 온전히 만나왔다. 그 시간이 지난 지금, 나무들을 떠났지만 그것들은 언제까지나 나를 설레게 만드는 존재로 내 마음에 들어와 버렸으니 인생의 변곡점이 된 책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보다 먼저 있었던 중요한 만남이 있다. 지금은 폐간된 <샘이 깊은 물>과의 만남이다. 잊혀가는 전통과 민속, 그리고 문화를 깊이 있게 다룬, 비판 정신이 깃든 여성지였으나 오히려 남성들에게 더 많이 읽혔었다. 여기에서 메꽃이라는 나팔꽃과 비슷하지만 나팔꽃처럼 유명하지 않은, 인도 원산의 나팔꽃과는 달리 우리나라 들판에서 자생하는 이 식물에 대한 원고를 쓰게 되면서 그 만남은 시작되었다. 이곳에서는 그간 내가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고 잡초처럼 여겼던 식물을 골랐는데, 기존의 식물 책에서 만나온 기계적인 정보에서 벗어나 우리 산야에 살고 있는 모습을 비롯해 우리의 삶과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요구했다.

나는 식물도감에 기껏 몇 줄로 설명된 메꽃에 관한 정보를 토대로 30장이 넘은 원고지를 채워나가면서 메꽃을 보고 또 보고, 찾고 또 찾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메꽃에 이어 두세 달에 한 번씩 산국, 과꽃, 탱자나무, 복숭아나무를 써가며 전공하는 학문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식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배웠고, 식물학적인 지식보다 더 넓고 깊은 식물의 세상을 만나는 연습을 했다. 발행인 한창기 선생은 한글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는데, 덕분에 아름다운 우리말로 글을 쓸 수 있는 훈련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해 전 한글날, 한글 단체에서 아름다운 우리말을 쓰는 분야별 인물로 나를 선정한, 내게는 큰 자랑스러움을 안겨준 인연도 사실 이때의 글쓰기를 통해 다듬어진 것이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지금처럼 식물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지 않았다면, 나는 실험실에서 DNA와 씨름하며 인용지수가 높은 세계적인 저널에 논문을 더 많이 싣는, 전혀 다른 색깔의 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 결과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후회는 없다. 이 만남을 계기로 이어진 이 땅의 수많은 풀들과 나무들과의 새로운 만남이 나를 행복한 식물학자로 만들어주었기에 감사하다.

*1962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임학과 및 동대학원 산림자원학과 박사. 저서로는 <우리 나무 백가지><한국의 야생화><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등 다수. 국립수목원 제9, 10대 국립수목원장.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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