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였나

한국과 일본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였나

19458, 35년여의 일제 식민지로부터 조선은 해방됐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남쪽과 북쪽에 미국과 소련이 진주하면서 한반도는 새로운 위기에 빠진다.

식민지 시대를 뒤이은 냉전의 회오리바람 앞에서

한국은 일제 식민지 과거사 청산이라는 당연한 숙제를 제대로 풀기 어려웠고,

일본은 초지일관 1910년 병합이 합법적이었다며 진정한 사죄도 응당한 배상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맞는 광복절.

한국 대법원의 일제 징용노동 배상 판결을 빌미로 삼아 아베 정권이 경제보복에 나섰다.

앞으로 한발 나아가기 위해 한일관계의 매듭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였는지,

어떻게 풀어야 할지 이성적으로 논의해보자.

·정리 유레카 편집부    

 

*본문은 <유레카> 2019년 8월호의 '키워드 리포트'를 부분 발췌한 내용입니다.  

 


 

일본의 주장은 틀렸다

반인륜 행위에 대한 배상책임 있다

 

20181030일 한국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리며 기업이 피해자 1인에게 1억 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한일협정으로 일본에 대한 한국의 배상 청구권이 소멸되었는데, 한국이 국가 간 약속을 위배했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1965년 한일협정의 최대 난관은 대일청구권이었다. 일제에 끌려가 고된 노역에 시달리던 강제징용 노동자들은 해방 후 갑자기 고국으로 송환되면서 임금이며 연금, 보험금 등을 챙기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미지급금을 비롯해서 식민지배 기간에 입힌 손실에 대해 배상과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한국으로서는 당연했으나, 양국의 견해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대일청구권 문제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박정희 정부는 1962년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일본에 특사로 파견한다. 김종필은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회담을 한다. 이때 두 사람은 -오히라 메모로 불리는 비밀문서를 작성했는데, 청구권 자금을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국가가 아닌 기업이나 개인이 자신의 신용으로 외국자본을 차입 형태로 들여오는 것 1억 달러 이상으로 정하자는 내용이었다. 한일협정에서 이 메모를 근거로 해서 상업차관만 3억 달러로 조정해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

일본군위안부와 징용노동자 배상에 대해 발뺌하는 일본의 태도는 협정 내용을 근거로 한다. 일본에 대한 한국의 배상 청구권이 이때 완전히 소멸됐다는 것이다.

 

 

일본군위안부나 징용노동자들에 대한 미지불금 반환 요구 외에 일본이 행한 강제노동, 학대, 모욕 등 반인륜적인 행위에 대한 배상 요구에 주목해보자. 식민지 시절, 한국인은 군인 혹은 군속으로 끌려가 전쟁터로 내몰렸고, 일본 본토에 징용으로 끌러간 노동자만 해도 72만 명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침략 전쟁 때문에 한국인 원폭 피해자, 일본군위안부’, 그밖의 성폭력 피해자, 세군전과 화학무기 피해자, 강제노역과 무차별 폭격 피해자 등은 그때의 상처로 지금까지도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피해를 입힌 당사자인 일본은 식민지배가 위법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한일청구권협정에서 대일청구권 문제가 다 해결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협정에는 반인륜 행위의 배상에 관해 협의한 내용은 전혀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배상 요구는 협정에 위배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국가가 외교를 통해서 합의를 했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사유재산권에 해당하는 개인청구권을 훼손할 수 있느냐도 문제다.

 

 

[출처] 유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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