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만남의 고리 / 정각스님

비 내리는 날 오후, 홀로 강촌역에 내려 본 적이 있는가. 그곳에서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본 사람, 지난날 다사로웠음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인생의 고통을 안다. 혜화동 길모퉁이 카페를 배회하며 홀로 웃음 짓는 사람에게도 삶의 의미를 물을 수 있다. 만남은 이내 헤어짐으로 변하는 만남의 법칙 속에서 모든 게 부질없는 것이라는 엄숙한 삶의 이치를 통달해버린 자. 그는 부재(不在)를 사랑한다. 그리고 스스로 눈의 침묵을 마주하며 하얀 날개를 꿈꾸겠지만, 백야의 고요만이 상념 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럼에도 끝없는 삶의 현실에 정주해야 하는 애욕자(愛慾者). 언제나 패배가 약속된 삶을 긍정하면서 인간 스스로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삶을 꿈꾼다. 그리고 또 다른 희망을 품게 된다.

삶의 부조리한 현실들. 그 끝없는 만남과 헤어짐의 별리(別離) 속에서 생겨나는 고통을 불교에서는 애별리고(愛別離苦)라고 부른다. 바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이다. 사랑하는 것의 소멸과 죽음 앞에서 그가 또 다른 사람을 원할 때, 우리는 말없이 떠나보내야 한다. 거기에는 마음의 고통을 수반한 혼돈이 내재해 있다. 고통은 왜 생겨나는가. 현전하는 다사로운 삶의 순간 속에서 인간은 영원성을 꿈꾼다. 또한 이를 몽상하며 사랑의 병을 앓는다. 이는 차라리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듯이 죽음에 이르는 병과도 같다. 그리하여 인간은 삶의 순간에 영원을 몽상하지만, 그의 마음은 실존적 소외의 그늘로 접어 들어간다. 그 근원은 집착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물을 나의 일부로 파악하려고 하는 나의 에고(Ego). 여기에 슬픔의 근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실존적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애초에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는 경전 아함경(阿含經)의 말씀을 따라야 할 것인가. 그러나 좀 더 근본적인 방안을 제시한 불교의 진리, 즉 삼법인(三法印)의 원리를 들 수 있다. 삼법인이란 불교 사상의 핵심인 연기(緣起)의 진리를 바탕으로 한 모든 존재의 3가지 속성, 즉 존재 형식을 말한다. 이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및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 내지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말하며 일체의 모든 것은 변화의 흐름 속에 있어 항상(恒常)하는 것이 없다. 그리고 라고 불리는 존재도 항구 불변의 실체가 아닌 인연에 의해 생겨난다. 따라서 모든 집착을 벗어버리고 연기의 법칙을 바르게 이해할 때, 비로소 참된 고요에 잠길 수 있다.

필연성이 아닌 인연의 끈에 의해 펼쳐진 만남과 헤어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언가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무한정의 책임감이 수반되는 것이고, 관계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마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사막 여우와 장미꽃 이야기처럼 관계 맺기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이며 사람과 현상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말한다.

인연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는 숙연(宿緣)이 담겨있다. 인연의 끈들이 스쳐 지나가다가 어느새 무르익어 만들어진 숙연은 피할 겨를도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신부가 되기 위해 가톨릭대에 입학했던 내가 이렇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도 어쩌면 숙연이라고 할 수 있다. 숙연적인 만남은 인생에서 자기 의지와 생각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숙연의 뿌리에 기인한다. 내가 모르는 그 끈이 나를 무의식적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람들과의 만남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나에게 있어서 또 다른 숙연은 문화재와의 만남이다. 그동안 수집한 2천여 점의 문화재는 생각지도 않는 순간에 나를 찾아왔다. 이 유물들과의 만남은 말 그대로 운명적인 것이었다. 우연이 모여 필연이 되듯, 그때그때 나에게 건네져온 문화재들은 인생의 소중한 만남이 되었다. 특히 독도와 관련된 200여 점의 지도를 찾기까지는 내가 속한 나라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책임감이 작용했다. 독도 문제와 중국의 역사 왜곡 문제 등을 바라보면서 우리나라의 정체성의 뿌리를 엿볼 수 있는 것이 곧 지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인연이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라면 반연(攀緣)은 억지로 끌어당겨야 하는 인위성을 띈다. 여기서 반()은 등반할 때 풀뿌리라도 잡고 올라가듯 억지로 끌어당긴다는 뜻을 지닌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성을 투영하기도 한다.

현시대에서의 만남은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어떠한 계기로든 숙연의 끈이 모든 것을 묶어버린다. 누구나 무심히 지나치다가 어느 순간 멈춰질 때, 그것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다. 숙연이라는 것이 나를 찾아오면 애써 뭔가를 하지 않아도 책임감이 생기고, 헌신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계기를 제대로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인생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찾을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행복에 닿을 수 있다. 숙연, 그리고 필연적인 만남의 고리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조계총림 송광사에서 현문스님을 은사로 출가. 동국대 불교학과 박사, 동국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불교신문 논설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매장문화재분과위원회)등 역임. 중앙승가대 교수, 조계종 고양 원각사 주지.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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