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특집 - 내가 배운 것] 씨앗의 얼굴


 

 

씨앗의 얼굴

 

 

지인 텃밭에서 하는 더부살이 농사는 내 삶의 또 다른 재미다. 작년에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서너 두렁을 개간하고, 모종을 심으며 바쁘게 지냈다.

올해도 봄소식과 함께 텃밭이 생각났다. 작년 경험을 살려 호미, 괭이, 낫을 들고 나가 잡풀도 거두고 겨우내 언 땅이 기지개를 펴는 데 한몫했다. 커진 욕심만큼 두렁 수도 늘고, “자주 얼굴 보여 줄게. 많이 수확하게 해 줘.”라며 텃밭과 희망찬 약속을 했다.

“올해는 뭘 심을 거니? 내가 호박 모종을 만들어 놨으니 한쪽 구석에 심거라. 호박은 알아서 자라니 신경 쓸 것 없다.”

친정 엄마의 전화를 받고 인터넷에 호박 두 글자를 쳤다. 노란 호박꽃이 활짝 웃고 있었다. 호박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결정했다. ‘좋다, 올해는 호박으로 해 보자.’

친정에서 가져온 모종을 일렬종대로 심었다. “호박은 띄엄띄엄 심어야 넝쿨을 감당할 수 있어요. 그렇게 심으면 나중에 주변 작물을 덮쳐서 힘들어집니다.” 남편 말에도 개의치 않고 반듯하게 열심히 심었다. 더불어 고추, 오이, 참외, 토마토, 가지, 고구마, 들깨, 열무, 옥수수도 심고 매일 언제 나오는지 살폈다.

작물은 일거에 쑥쑥 얼굴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호박꽃은 축제 등불을 떠올릴 만큼 장관이었다. 처음으로 호박이 열리는 것도 보고, 호박잎의 깔깔한 성질이 우리에게 중요한 영양소를 주는 것도 배웠다. 옥수수 역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강인한 기운으로 솟아올랐다. 그 모습이 신비에 가까웠다. ‘무언가의 성장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이런거구나.’

첫 호박을 거둔 날, 친정 엄마에게 달려갔다. “짜잔. 엄마가 준 호박이지.” “그새 그렇게 컸냐? 나도 내일 한번 가 봐야겠다.”

다음 날 엄마는 고추, 오이, 가지와 깻잎을 한 아름 땄다. 호박밭으로 간 엄마는 이곳저곳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야야, 여기 큰 놈 하나 숨어 있다. 넝쿨 자르게 가위 가져와라.”

줄기 끝자락 깊숙한 곳에 커다란 호박이 열렸다.

“제 어미 닮아서 예쁘게도 생겼네.” “엄마가 호박 어미를 어떻게 알아요?” “내가 씨앗을 받아 심었는데 왜 모르겠냐. 작년에 늙은 호박 하나 얻어서 그 씨를 받아 놓았다가 모종을 만든 거지. 씨앗도 둥글둥글하니 예뻐서 호박도 예쁘겠다 했다.”

엄마의 말에 마음이 둥둥 설레었다. ‘그렇구나. 씨앗도 얼굴이 있지. 왜 나는 볼 생각을 못했을까?’ 그러고 보니 옥수수 씨앗을 심을 때 칠십 개의 모양이 제각각이었다. 한 알 한 알이 모여서 탐스럽고 달콤한 옥수수를 무려 서른 개나 선물했다.

‘씨앗의 얼굴에 따라 열매를 가늠하는 것처럼, 지금 내 얼굴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겠지?’ 그날 밤 화장대 앞에서 내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갑자기 노랫말이 떠올랐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내 얼굴에 꿈이 담길까. 내 씨앗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부터라도 그 씨앗을 잘 키우면 예쁜 얼굴이 될까.

 

박향숙 님 | 전북 군산시

 

[출처] 큰글씨 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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