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부엌수업 l 묵은지 된장찌개와 부추 목살 볶음

 

 

충남 공주가 고향인 허삼희(79) 할머니는 1941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한국의 주요한 근현대사를 모두 겪었다. 일제강점기였던 네 살 무렵 인천으로 피난 갔을 때 방공 모자를 쓰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던 일,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전쟁이 발발해 마을사람들과 함께 산을 넘어 부여로 피난 갔던 경험 등은 여전히 그녀에게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친정엄마가 만 평 논을 가진 부잣집 태생이었어도 전쟁 겪으면서 어려운 일이 많았어요. 먹을 게 많이 없으니까 김치를 잔뜩 담갔다가 찌개도 해먹고 볶거나 쪄 먹거나 그랬죠.” 그렇게 지난한 세월을 살아온 그녀는 현재 경기도 하남에서 외동딸과 사위, 손녀와 함께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다. 오래 묵힌 김치를 꺼내 볶거나 찌개를 끓여주면 그게 그렇게 맛이 좋을 수 없었다. 가족에게 묵은지 된장찌개를 해줄 때면 삼발이에 찌개를 끓이던 친정엄마 생각이 나곤 한다. 이제 묵은지 된장찌개는 아흔 다섯에 돌아가신 친정엄마를 시작으로 손녀까지 삼대 째 함께 먹는 가족의 음식이 됐다.


“묵은지로 찌개를 끓일 때는 먼저 텁텁한 고춧가루를 다 깨끗이 빨아서 살짝 삶아줘야 해요. 그 후에 송송 썰거나 쭉 찢어서 된장, 매운 고추, 마늘을 넣고 같이 주물러 줘요. 그리고 난 뒤에 멸치로 우린 육수에 넣고 바글바글 끓이면 돼요. 두부는 구색도 안 맞고 맛을 제대로 낼 수 없으니까 넣지 않고요.


여든이 다 되어가는 나이지만 그녀는 지금까지도 부엌의 총 주방장 역할을 맡고 있다. 그녀는 결혼 후 지금까지 50년 넘도록 요리를 했지만 단 한 번도 귀찮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음식은 마음과 정성이 들어가야 해요. 정성이 안 들어가면 제 맛을 못 내죠. 그런 마음으로 지금까지 음식을 해왔어요.”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집에서 혼례나 장례를 모두 치렀다. 그때 다 그녀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한 음식을 만들었다. 스스로는 요리를 잘 한다고 생각한 적 없지만 그녀의 음식을 먹는 이마다 하나 같이 너무 맛있다는 반응을 보여 다행이었다.

 

 

시댁 식구와 친구는 물론이고 딸의 학교 선생님, 조카사위까지 그녀의 음식을 좋아했다. 입이 짧은 그녀의 딸도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기 전에 엄마의 음식 조리법을 하나하나 받아 적어 갔다. 일주일 동안 따라다니며 기록해간 조리법은 150가지가 넘었다. 그녀는 딸이 어린 손녀를 데리고 먼 곳으로 떠날 일이 안쓰러워 알고 있는 요리의 조리법을 세세히 일러주었다. 시간이 흘러 초등학생이었던 손녀가 자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자, 이번엔 딸이 엄마의 요리법을 추려 타이핑을 한 뒤 코팅까지 해 떠나는 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나 원조의 손맛을 따라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조리법을 따라해도 뭔가 다른 할머니의 손맛이 그리웠던 손녀는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먹고 싶은 음식 목록을 말했고 그녀는 신이 나 귀국 몇 주 전부터 손녀를 생각하며 차근차근 음식을 준비했다.



하루 두 끼의 약속


네 식구 끼니를 책임지는 그녀만의 요리 철학이 있다면, 모름지기 식구란 한 자리에서 밥을 같이 먹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온 가족 은 하루 두 끼 즉, 아침밥과 저녁밥을 밥상에 둘러앉아 같이 먹으며 돈독한 가족애를 나눈다.


“사위가 생전 밖에서 술을 마신 적이 없어요. 퇴근하면 공부를 하거나 집에서 저녁 식사하면서 술 한 잔 하는 게 전부에요. 딸과 결혼한 지 26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늘 행동이 분명해요.” 사위는 외동딸인 아내를 위해 장인, 장모님과 함께 사는 것을 자청했다. 사위의 마음 씀씀이 덕분에 하나 뿐인 손녀딸의 탄생과 성장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수 있으니 이 또한 그녀의 행복이다.

 

 

요즘 그녀는 자기 전 사위와 함께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식구와 함께 누리는 하루치의 즐거움이다. 사위 역시 날마다 식구들의 끼니를 준비하는 장모님을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막걸리를 사오는 일을 잊지 않는다. 그런 사위의 마음을 아는 그녀 역시 저녁 식사에는 끼니가 되는 동시에 안주로 먹을 수 있는 부추 목살 볶음이나 떡볶이를 즐겨 내놓는다. 특히 부추 목살 볶음은 부추의 개운함과 매실청, 생강즙에 잘 숙성시켜 달짝지근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살이 기가 막히게 어울려 온 가족이 즐겨먹는 요리다. 부추 목살 볶음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두런두런 이야기하다보면 둘이서 막걸리 서너 병은 거뜬히 마실 때도 있다


여전히 갖가지 요리 구상을 할 만큼 의욕이 넘치는 그녀지만 요즘은 예전만큼 체력이 좋지 않다는 걸 몸으로 느낀다. 시대와 역사가 빚어낸 풍파 외에 큰 시련 없이 살았을 것 같은 고운 모습인데 알고 보면 수술을 참 많이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병원을 다니며 몸 곳곳을 치료 받는 중이다. “책을 참 많이 읽었어요. 네 식구가 함께 서점에 가서 각자 읽고 싶은 책을 골라왔죠. 4년 전에 허리 수술한 뒤부터는 책을 못 보겠더라고요. 지난 줄거리를 자꾸 잊어버려요.” 책을 손에서 놓은 뒤 그녀가 발견한 취미는 퍼즐 맞추기였다. 1000피스 퍼즐은 물론 3000피스 퍼즐도 거뜬히 맞추곤 했다. 호기심과 의욕이 많은 그녀에게 안성맞춤인 취미 활동이었다. 그러나 이 취미생활도 요즘엔 체력적으로 힘들어 잘 못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종류는 변하고 있지만 식구들의 끼니를 생각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그녀는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는 가족들을 볼 때면 여전히 보람을 느낀다. 반백년 동안 음식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요리의 무궁무진한 세계 속에서 자기만의 응용력과 구성력을 활용해 앞으로는 장아찌 종류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바람도 생겼다. 올해는 오랜만에 손 가 제일 좋아하는 새우장도 만들 생각이다. 다가오는 겨울, 날은 점점 추워지겠지만 가족을 위한 정성으로 따뜻하게 데워질 허삼희 할머니의 부엌이 벌써부터 그려진다.

 

 

글 이수진 기자 | 사진 최순호

 

[출처]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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