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이 사라진 뮤지컬무대를 꿈꾸며 _ 고은령

 

 

고등학교 학생봉사활동 기간에 장애아 유치원생들을 데리고 뮤지컬을 관람했던 기억이 난다. 시각장애아 동호 옆에 앉은 비장애인 아이에게 그애 엄마가 “옆에 애랑 몸 닿지 않게 조심해”라고 던진 말에 슬프게 흔들리던 동호의 눈동자를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 한편이 아릿해진다. 15년 전 일이 불현듯 기억난 건 아나운서 출신의 뮤지컬 공연기획자 고은령(39)의 블로그 글을 읽으면서였다.


‘이기심이 서로를 더 외롭게 만들지 않게 주변을 돌아보며 살아야겠습니다.’


그때 우리가 봤던 뮤지컬이 그녀가 제작한 공연이었다면 여섯 살 해맑은 아이는 세상의 차가운 편견 대신 삶의 희망을 안고 극장을 나서지 않았을까? 시청각장애인들도 편하게 관람할 수 있는 베리어프리(barrier-free) 뮤지컬을 제작하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나란히 동행하는 그녀의 삶이 더욱 가치 있게 여겨진다.


신체적인 한계를 넘어 모두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려는 그녀의 세심함은 무대에서 더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청각장애인들이 무대와 대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수어통역사와 자막 상영용 스크린을 최적의 거리에 정교히 배치하는가 하면, 시각장애인을 위해 대사가 있건 없건 모든 장면에서 배우들의 표정까지 자세히 해설해준다. 특히 청각장애인들이 배우가 부르는 노래의 리듬감을 느끼도록 박자에 맞춰 움직이게끔 만든 자막에서는 기획자의 따뜻한 배려가 확연히 느껴진다.


“하나하나 배워가며 만들고 있어요. 청각장애인을 위한 통역만 해도 수어만 준비하면 될 줄 알았는데 수어에 익숙지 않은 분들도 계시니 자막도 필요했죠. 시각장애인을 위한 해설도 대사가 있는 장면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표정과 제스처도 궁금해 하시더라고요. 이 일은 제 고정관념을 하나씩 깨뜨리는 과정인 것 같아요.”


기존의 생각을 조금씩 수정하면서 그녀가 2012년부터 제작해온 창작뮤지컬은 총 일곱여 편에 이른다. 첫 작품 <가족로망스>부터 최신작 <아빠가 사라졌다>까지 주로 가족의 사랑을 주제로 펼쳐지는 고은령표 뮤지컬은 웃음과 감동이 모두 깃들어 있지만 특히 작품 전체에 흐르는 따스한 유머가 돋보인다. 공연 관람을 불가능한 일로만 여겼던 터라 공연을 처음 접해볼지 모를 관객들이 즐거운 기억을 갖고 돌아가 꾸준히 문화생활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은 그녀가 직접 쓰는 뮤지컬 대본에서도 따뜻하게 전해진다.

 



아나운서를 그만두고 도전한 공연기획


장애인예술가들이 서는 무대는 많아도 장애인들이 관람할 수 있는 공연은 국내에 거의 없다. 베리어프리 공연이 사회적 관심에서 한참 비껴나 있는 분야이건만 그녀는 공연기획사 ‘스튜디오뮤지컬’을 꾸려 생업의 터전으로 삼았을 만큼 열정이 뜨겁다. 직원 한 명과 근무하는 열 평 남짓한 오피스텔 사무실의 운영비마저도 최소화하기 위해 가급적 재택근무에 의존하는 넉넉지 못한 형편이지만 그녀는 현재의 삶이 매우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장애인 대상 공연이라는 사실을 알고 대관계약을 취소하거나 기성 뮤지컬 제작진이 베리어프리 버전으로 각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등 그동안 남몰래 겪어온 서러움을 털어놓으면서도 관객의 웃음을 책임지기 위해 힘을 낸다는 그녀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지금이야 기꺼이 장애인의 행복파수꾼을 자처하는 그녀이지만 대학시절만 해도 오로지 자신의 미래 설계에 여념 없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누구나 선망하는 직업을 갖는 것이 곧 성공한 삶이라 여겨 선택한 직업도 아나운서였다. “2005년에 KBS 아나운서가 되었지만 대본대로 전달하는 일이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저는 틀 안에서 정해진 일만 하며 살기 힘든 사람이란 걸 깨닫고는 더 늦기 전에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일에 도전하며 살고 싶어졌어요. 안정적인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머릿속에 있던 공식이 완전히 깨져버렸죠.”


어렵게 이룬 첫 꿈과 5년 만에 미련 없이 이별한 그녀는 퇴직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해 학창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예술 공연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한 가지 숙제에 매달렸다. ‘공연을 왜 극장에서만 봐야 할까?’ 여러 이유로 공연장을 찾지 못하고 있을 사람들을 위해 그녀가 생각해낸 방법은 오디오극이었다. 기존 연극 및 뮤지컬을 낭독극으로 각색해 전달하는, 현 스튜디오뮤지컬의 시초인 팟캐스트 ‘자리주삼’은 그렇게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대한 그녀의 새로운 관점으로부터 탄생했다. 자리주삼은 작품 당 최대 20만회라는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많은 이들에게 이어폰만 꽂으면 어디든 극장이 되는 신선한 경험을 안겨주었다. 그러면서 생각지 못했던 사람들의 반응이 그녀에게 뜻밖의 감동을 주었다. 바로 공연을 시각적으로 체험하지 못해 누구보다 오디오극이 필요했을 시각장애인들이었다.



편견에 가려졌던 시각장애인의 행복


“공연의 재미를 처음 느꼈다는 피드백을 받자 비로소 제가 할 일을 찾은 것 같아 감격스러웠어요. 아나운서를 그만두고 사실 많이 불안했거든요. 무작정 공연이 좋을 뿐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렇다고 프리랜서로 불러주는 곳도 없었어요. 아무도 저를 찾지 않을 때 유일하게 장애인 분들이 저를 필요로 했던 거예요. 제가 있어야 할 곳은 그들의 옆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오디오극에 그치지 않고 실제 무대에 작품을 올려 혼자 방에서 공연을 듣던 장애인들을 세상 밖으로 불러낸 건 그 후 또 하나의 편견이 깨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각장애인들도 공연을 ‘보고싶어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시각장애인은 오디오극으로도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이 오산이었음을 깨달은 그녀가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리기 시작한 베리어프리 뮤지컬들은 공연 관람을 포기하고 살아온 장애인들에게 뜨거운 현장의 열기를 전해주었다. 그저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공연으로 기쁨을 주고 싶다는 작은 바람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그 덕분에 그녀는 보다 원대한 꿈을 품게 되었다. 극장에 동행한 보호자들까지 공연을 즐기는 모습을 보며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행복하게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 것이다.

 

 

“요즘 비장애인을 대상으로 장애인 인식개선을 위한 교육극을 진행하고 있는데 인식의 변화가 꽤 크게 느껴져요. 처음에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던 분들도 점점 눈빛이 초롱초롱해지다가 장애인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질문까지 하시거든요. 제가 더 열심히 뛰면 장애인을 차별의 대상이 아닌 동등한 이웃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지겠다는 기대가 커졌어요.”


그녀가 아무리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무너뜨리기에 한 개인의 힘은 너무 미약하지 않을까? “편견을 하나씩 깨뜨릴 때 세상은 두 배씩 아름다워질 거예요”라는 그녀의 희망에 찬 말에 내 마음의 편견부터 버리기로 마음먹는다. 보고 들을 수 없는 이들이 누구보다 환한 표정으로 뮤지컬을 감상하는 기적이 피어난 자리는, 한 사람의 편견이 사라진 자리이기에.


글 한재원 기자 사진 최순호

 

[출처]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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