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도, 인생도 마음먹기에 달렸다네!

 

“작년에 남편이 직장암 수술을 했어요. 이도 좋지 않아서 영 먹는 게 시원찮았지요. 고기랑 야채를 다져 넣어 떡갈비를 만들어주면 잘 먹겠다 싶었어요. 떡갈비가 뭐 별건가요? 명절 때 부쳐 먹는 동그랑땡을 좀 더 크게 만들면 될 것 같았어요.”

 

하옥순 할머니의 떡갈비는 엄밀히 말하면 떡갈비와 동그랑땡의 중간 형태다. 퍽퍽함을 없애기 위해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반반 섞어 주먹만 하게 빚어낸 모양은 영락없는 떡갈비인데 석쇠에 굽는 대신 동그랑땡처럼 밀가루와 계란을 묻혀 프라이팬에서 부친다. 노릇노릇하게 익은 떡갈비를 바로 흰쌀밥에 얹어 먹어도 꿀맛이지만 여기서 끝이 아 다. 밥을 깔아주고 그 위에 떡갈비, 볶음김치, 치즈를 차례로 올려준다. 마지막에는 다시 밥을 얹는다. 그 모양이 흡사 햄버거와 비슷하다. 일 명 ‘떡갈비밥버거’는 다른 반찬 꺼낼 필요 없이 한 손에 들고 먹기 편하고 놀러 갈 때 싸가기도 좋은 비장의 신메뉴이다.

 

 

순식간에 떡갈비 스무 개를 부쳐낸 뒤 밥버거까지 완성한 그녀는 서둘러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둔 찜통을 확인한다. 전날 밤에 미리 담가둔 찹쌀을 40분 정도 쪄서 커다란 양푼에 쏟아낸 뒤 간장, 참기름, 설탕으로 간을 하고, 대추, 밤, 건포도, 은행 등을 넣고 버무려준다.

 

“음식 한 김에 경로당에도 나눠주고 같이 먹으려고 약밥도 해봤어요. 슈퍼에 깐 밤이 없어서 생밤을 사 왔는데 남편이 까줬어요. 잘 도와줘요. 점잖은 양반이에요.” 우체국에 다니다 퇴직한 남편은 전형적인 공무원 체질로 정직하고 성실하며 가정적인 성품의 소유자다. 부부가 해로한 50여 년 넘는 세월 동안 한결같았다. 52년 전 영등포 방직공장에 다니던 26살 서울 오류동 처녀는 중매로 시흥 사는 총각에게 시집을 왔다. 당시만 해도 시흥은 개발이 되기 전이라 시골이나 다름없었다. 문틈으로 훔쳐본 키 큰 청년에 마음이 설레기는 했지만 친정과도 멀고 논과 밭뿐인 곳으로 시집가기는 싫었다. 하지만 다음날 남자 집에서는 사주단자를 들고 와 그녀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혼 후 한동안은 남편의 벌이로 살림을 꾸렸다. 하지만 식구가 늘고 두 아이 키우기에 공무원 월급은 박하기만 했다. 큰딸이 국민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화장품 외판원 일을 시작했다. 그때 작은 아이가 6살이었으니 어린 자식을 떼어놓고 나오는 어미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 지난 옛일이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남편은 1995년 33년 동안 근무하던 우체국을 정년퇴직했다. 곧이어 퇴직금으로 받은 1억 원으로 만두공장을 차렸다. “지금은 억 소리가 대수롭지 않지만 당시에는 큰돈이었어요. 직원 다섯 명을 두고 중국집에 야끼만두를 납품했어요. 그런데 2년 있다가 IMF가 터지고 큰 공장들이 치고 들어와 부도가 났어요. 퇴직금을 다 날렸지요.”

 

그제야 그녀는 돈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막막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밤마다 동네 뒤편에 있는 공동묘지에 가서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날도 인적 드문 묘지 앞에 주저앉아 죽어야 할지 살아야 할지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그때 갑자기 하얀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설마 귀신일까 싶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지만 궁금한 마음에 조심스레 다가갔다. 하얀 형상의 정체는 옆 단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었다. “아들이 교통사고가 나서 걷지를 못한대요. 그 엄마도 속이 답답하니까 나처럼 나온 거죠. 그 얘기를 들으니 내 걱정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더라고요. 사지 멀쩡하니 돈은 벌면 되잖아요. 그때부터 마음을 고쳐먹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매일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 첫차를 타고 상가건물, 요양병원 등으로 청소 일을 다녔다. 작년 8월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면서 일을 그만두기까지 자그마치 10년 넘게 궂은일 가리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그녀다. ‘어휴, 징그러!’ 하는 한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힘이 들 때면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거 없어.’ 그녀가 살아온 궤적이 이를 여실히 증명해준다.

 

 

맏며느리로서 집안의 대소사 또한 그녀 몫이었다. 시동생 세 명을 모두 결혼시켰으며, 시부모님 장례도 직접 치렀다. 그때마다 몇 백 명의 식사를 성심성의껏 차려냈다. 한 번은 어느 잔칫집에서 먹은 수구레가 맛있어 물어물어 비법을 알아내 집안 잔치에도 올렸더니 칭찬이 자자했다. 이뿐만 아니라 청소하던 상가의 맛집으로 소문난 돈가스집에도 비결을 물어 손주들에게 해줬더니 아주 좋아했다.

 

매사 바지런했고 일을 마다하지 않은 세월이었다. 이제 청소일도 그만두어 쉬어도 되련만 그녀는 여전히 바쁘다. 집에만 있자니 좀이 쑤셔 밖으로 나가 일거리를 찾아서 한다. 경로당 식사도 차려주고, 노인일자리도 나가고, 동사무소에서 운영하는 ‘나이야가라 실버봉사단’ 회원으로 활동하며 동네 청소에도 솔선수범이다. 이 모든 게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 그녀는 매일 아침 일어나 30분씩 실내 자전거 타는 일을 빼놓지 않는다. 힘차게 페달을 밟다 보면 자전거를 타고 화장품을 팔러 다니던 때가 간간이 생각난다. 눈 깜짝할 사이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젊은 새댁의 얼굴에는 어느덧 깊은 주름이 패였지만 미소는 한결 온화하고 편안해졌다. 돈보다 값진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글 김윤미 기자 사진 최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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