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달래주던 호박죽 한 그릇의 행복


가난을 달래주던

호박죽 한 그릇의 행복

전쟁이 끝난 후 모두가 넉넉지 못한 시절이었지만 정세영 할머니의 유년은 유독 배고팠다.

전라도 산골의 고향 마을에는 쓸 만한 전답이 부족했고, 일곱 식구가 먹기에는 늘 쌀이 모자랐다.

배고픔을 달래주던 건 아버지가 산비탈에 심어놓은 호박. 가을이 되면 잘 익은 호박 속을 긁어 죽을 끓여 먹었다

수십 년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글 김윤미 기자|사진 한영희

 

세월은 눈 깜짝할 사이라더니 그 말마따나 지난해 첫 손주를 보게 된 정세영(67) 할머니도 어느새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검은 머리칼에 주름 없이 깨끗한 피부의 그녀에게 할머니란 호칭은 어색하기만 하다. 더구나 고생 한번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온화한 표정은 그녀를 한층 어려보이게 한다.

“아니에요. 고생 많이 했어요. 진성의 <보릿고개> 가사가 딱 제 얘기예요. 전라도 고창 산골마을이 고향 인데 8살 때부터 밥 짓고 농사일을 거들었어요. 9살인가 10살 때였나 한해가 들어서 특히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전쟁 후 온 나라가 궁핍했지만 산골마을의 사정은 더욱 어려웠다. 변변한 전답이 없고, 지금처럼 농사법도 발달하지 않아 수확량은 늘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 아버지가 산비탈에 심어놓은 호박이 그렇게 요긴할 수 없었다. 그 호박으로 죽도 끓이고, 떡도 찌고, 엿도 만들어 먹었다. 특히나 호박죽은 쌀밥보다도 귀한 고급 음식이었다. 그 시절 호박죽에는 쌀가루가 아닌 조가 들어갔다. 쌀은 고사하고 보리도 일찍 떨어진 때, 조를 절구에 찧어서 채에 받쳐 고운 가루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몫이었다.

 

“끼니를 연명하려면 그마저도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했어요. 그때는 배고픔보다 더 무서운 건 없었으니까요.” 어렸을 때 물리도록 먹은 음식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호박죽을 좋아한다. 시장에 가서도 호박죽을 팔면 그냥 지나치지 못해 꼭 사 먹고, 결혼식장 뷔페에서도 호박죽 한 그릇을 꼭 떠먹는다. 많이 먹어본 만큼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음식도 호박죽이다. 이제는 먹을 게 차고 넘치는 시절, 재료를 아낌없이 넣어 호박죽을 한층 업그레이드시켰다. 동지 때 먹는 팥죽에서 힌트를 얻어 단팥과 새알옹심이까지 넣은 호박통단팥죽이다.

“호박과 팥의 단맛이 적당히 어우러져 저는 거의 간을 따로 안 해요. 거기에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던 파숙지를 함께 곁들이면 그야말로 추억의 한 상이 차려지죠.”

 

파숙지는 쪽파를 고춧가루, 간장, 참기름 등의 양념에 조물조물 무친 파나물로 전라도 지역에서는 파숙지라 불렀다. 김치도 귀하던 때라 밥상에는 김치 대신 파숙지가 항상 올라왔다. 가족 중에서는 어머니가 특히나 파숙지를 좋아하셨다. 환갑을 채우시지 못하고 하늘 여행 떠나신 어머니가 살아생전 파숙지를 드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입맛을 고스란히 닮은 그녀는 호박죽과 파숙지를 먹으며 그 시절을, 그리고 사무치게 그리운 어머니를 추억하곤 한다.

 

매일매일 젊게 사는 비결

 

배불리 먹는 것이 늘 소원이었지만 가난이 서러웠던 건 꼭 배고픔 때 문만은 아니었다. 중학교 합격통지서를 받고서도 등록금이 없어 진학 을 포기했던 일이 그녀에겐 지금도 크나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당시 중학교 등록금이 9,900원이었어요. 쌀 한 가마니가 3,000원 정도 했는데 우리 식구가 1년에 쌀 세 가마니를 먹었으니 한 해 양식과 맞먹는 금액이었지요. 그걸 아는데 어찌 중학교에 가겠다고 하겠어요. 그때 아버지한테 중학교에 보내달라고 조르기라도 해볼 걸 조금 후회 가 되기도 해요.”

일찍이 공부 대신 양장학원에서 기술을 배운 그녀는 전라남도 영광의 양장점에 취직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경력을 쌓은 뒤에는 서울로 올 라와 피혁회사에 다니며 착실히 돈을 모았고 길음시장에 양품점 자리를 인수해 어엿한 사장님이 될 수 있었다. 결혼을 하면서 가게를 접었지만 가사와 육아로 바쁜 와중에도 일손을 놓지는 않았다. 이웃이나 주변 사 람들에게 알음알음 재봉이나 옷수선 일감을 받아 생활비에 보탰다. 이토록 부지런하게 일을 한 건 어쩌면 본인이 겪은 가난을 자식들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던 그 설움을 두 딸에게는 물려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과외며, 학원이며 아이들이 원한다면 있는 힘껏 뒷바라지해줬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엄마 손이 덜 필요해지자 남편과 함께 송어횟집을 오픈해 밤늦게까지 가게를 지켰고, 뒤이어 꽃집을 운영할 때도 새벽같이 꽃시장을 다니며 누구보다 하루를 길게 살았다. 덕분에 두 아이 모두 부족함 없이 가르쳤고, 특히 큰 아이는 난다 긴다 하는 아이들이나 간다는 외고에 진학하더니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오고 대학원 공부까지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에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은 여전했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배움에 대한 갈망은 그녀를 검정고시로 이끌었다. “괜히 부끄러워서 검정고시 공부한다고 남편한테 알리지도 못했어요.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 혼자 책 보면서 공부했지요. 열심히 해서 고졸 검정고시까지 합격했어요.”

 

대학에도 가고 싶고, 영어공부도 하고 싶고, 컴퓨터도 배우고 싶은 정세영 할머니. 배움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손주를 봐주기 위해 서울 화곡동 집에서 오금동 큰딸네를 오가는 바쁜 일상 중 짬이 날 때마다 책도 읽고, 유튜브 강의도 열심히 챙겨보는 이유다. 배움으로 충만한 하루를 들여다보고 나서야 그녀가 같은 연배에 비해 유독 젊어 보이는 비결을 알았다.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에 적혀 있다는 문구가 그 답이 될 것이다. ‘젊게 사는 비결은 끊임없는 배움. 배움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출처]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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