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에세이] 보이지 않는 행복의 나라 / 박경선, 화가

나에게 ‘행복’이란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절대적 가치이다. 하지만 행복은 언제나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존재하는 동경과 갈망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 채워지지 않는 행복에 대한 욕구로 현재를 한껏 즐기지 못했고 내가 꿈꾸는 ‘완벽한 행복’은 늘 부재 상태였다. 

지난 2015년, 나는 ‘Seeds of empowerment’라는 비영리 단체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그 기간에 여러 나라 아이들을 만나 행복에 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리고 그 경험 속에서 내 안의 ‘행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타당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믿었던 ‘완벽한 행복’이란 무엇이었을까?

내 작품 중 한 아이의 이야기이다. <Nederlands-Tanzania_blij-furaha_(거짓말을 하고 있어. It’s lying)_48x72inch_Oil on canvas_2016> 그림 속 아이는 탄자니아에 살고 있다. 이 아이는 먹을 물도 구하기 힘든 열악한 환경에 살고 있었으며 꿈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그곳에 있는 대부분의 아이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선생님이나 의사 등 마을 발전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꿈이 이루어지면 참 행복할 거라고. 

그런데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꿈이 비슷할 수 있을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에 진학해서 고향의 발전에 도움 되는 것이 모두의 행복이라고? 어떻게 행복의 기준이 같을 수 있지?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만난 아이들의 행복에 대한 정의는 비슷한 지역이나 환경, 소속된 공동체에 따라 어딘가 묘하게 닮아 있었다. 꼭 행복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약속하고 서로에게 배운 것처럼 한 방향을 향해 있었다. 나는 인터뷰를 통해 행복이라는 것이 어쩌면 살면서 자연스레 배우고 익혀지는 언어와 같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원하는 행복은 정말 내가 원하던 것일까? 우리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의 본질은 무엇일까? 왜 끊임없이 행복을 찾아 헤맬까? 

나의 작품은 사회 구조 속에 갇혀 있는 ‘행복의 의미’의 한계를 이야기한다. 지난 몇 년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행복의 정의가 비슷한 환경이나 공동체에 따라 닮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지금껏 믿어온 ‘완벽한 행복’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가치 있다고 의미 부여한 행복의 실체는 무엇일까? 사회의 약속일까? 절대적인 나의 욕망일까? 내가 관계하는 사회와 타자가 변해도 행복의 정의는 그대로일까? 우리는 주변의 시선이나 사고방식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정말 나를 위한 행복을 향해 가는 중일까?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믿고 있지만, 그 자유나 자율성은 상당히 제한적이다. 라캉이 ‘타인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했듯이 행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개인의 욕망이 아닌 사회 구조 속에서 습득한 또 하나의 약속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누군가의 삶을 동경하고 누군가는 나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처럼. 

나는 이것이 현대인의 행복에 대한 영원한 목마름의 근본 원인 중 하나라고 추측해본다. 그리고 이것을 행복을 찾는 아이와 사회의 약속의 하나인 언어를 이용해서 풀어보고자 했다. 내가 절대적이라고 믿고 추구해온 행복의 실체가 어쩌면 학습된 인식에서 만들어진 환상과 허상이 아닐지, 얼마나 불완전하고 가변적일 수 있는지 끊임없이 경계하고 탐구하며. 그렇게 나는 그 과정을 작업에 담아내고 있다. 

 

1983년 출생. 숙명여대 회화과 학사, 동 대학원 조형예술학과 석사를 거쳐 박사과정. 10회 이상의 개인전과 이인전, 아시아탑갤러리 호텔아트페어, 화랑미술제, Kaleidoscope, Artbeatus갤러리(홍콩, 중국) 등 닷의 단체전 참가.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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