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스토리] ‘호랑이 형님’이 이끌어준 길 / 이나미, 북프로듀서·스튜디오 바프 대표

미술대학 시각디자인과 3학년 시절, 과감히 학교를 자퇴하고 미국 유학을 떠나던 때의 꿈은 ‘일러스트레이터’였다. 내 이야기를 대중과 그림으로 소통하는 일의 전문가가 되고 싶었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워보자는 생각에 다시 1학년부터 시작, 온몸으로 부딪쳐 열심히 하기는 했는데, 졸업 후에야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더욱 분명해졌다. 

일러스트레이터의 작업 영역 중 관심이 간 분야는 ‘책’이었는데, 누군가의 글이 있어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의뢰를 받아야만 시작되는 일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책과 관련한 일을 하며 스스로 발생하는 삶을 살려면 글을 써야 했다. 책을 무대로 글과 그림이 일관된 생각, 같은 결의 감성으로 더욱 감동적인 이중창을 연출해내는 일, 하나의 책이 발생되어 독자의 손에 가닿을 때까지 전 과정을 지휘할 전문가가 되려면 일러스트레이션과 디자인에 더하여 글을 다루는 역량을 키워야 했다. 

그렇게,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전문가의 역할을 가장 빨리 설명할 수 있는 이름을 위해 떠올린 것이 ‘북프로듀서’였다. 영화를 만드는 일에 영화감독의 역할이 중요하듯, 책을 만드는 일에는 북프로듀서의 역할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본격적인 북프로듀서의 길을 걷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전공 공부를 위해 석사 연구 과정을 스스로 설계했다. 글과 그림과 디자인을 지도해주실 세 분을 지도교수로 모셔 길을 만들기 시작했고, 교수님들은 그런 나를 아낌없이 응원해 주셨다.

북프로듀서로서의 첫 번째 고민은 ‘무슨 책을 만들 것인가’와 ‘어떻게 만들 것인가’인데, 석사 연구과제로 결정한 것은 ‘한국 전래동화’의 프로듀싱이었다. 이야기를 통해 전해 내려온 ‘한국인의 마음’을 한국인인 나만큼 잘 이해할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 국제 어린이 도서 시장에서 차별화된 북 콘텐츠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등을 통해 내린 결정이었다. 본격적인 글쓰기에 앞서 비교적 수월한 글쓰기라는 점도 결정에 한몫을 했다. 한글을 통해서는 한국적 정서를 느낄 수 있게 하고, 영문을 통해서는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영대역’의 책을 전제로 했다. 

연구주제로 선택한 첫 번째 이야기는 ‘나무꾼과 호랑이 형님.’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한 이야기를 ‘retelling’하는 작업을 거쳐 한글, 영문으로 텍스트를 만들었다. 서양식 그림만 그리던 내가 처음으로 수묵화를 연구했고, 어머니를 잃고 슬픔에 잠긴 표현을 위해 무수히 많은 호랑이를 그렸다. 매킨토시가 보편화되기 전이라 가장 어려운 작업은 ‘레이아웃’이었다. 다들 감으로 그림 크기와 위치를 정하고, 식자를 쳐서 붙이는 방법으로 책의 내지 화면을 정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내 눈에 띈 것이 1% 단위로 확대·축소가 가능한 복사기였는데, 이를 사용할 수 있는 킨코스(kinkos)가 동네 가까이 생긴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나는 그림을 들고 그곳으로 출근, 온종일 복사기 옆에 서서 확대·축소 복사한 그림과 글자를 잘라 붙이며 조정하는 작업으로 레이아웃을 완성했다. 

북프로듀서로서의 또 다른 고민은 ‘누가 과연 내 책을 출판해줄 것인가’이며, ‘내 책을 가장 잘 팔아줄 출판사가 어디일까’에 대한 부분이다. 그때 내가 원하는 출판사들은 대부분 뉴욕에 있었는데, 나는 소위 북 프로포절(book propopsal)이라는 것을 준비해 우편물을 보냈고, 친절한 문장으로 거절하는 ‘rejection letter’를 수없이 받아보았다. 

그러나 운명의 길은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부터 열렸다. 대학원을 졸업하던 해에 <나무꾼과 호랑이 형님>은 한국에서 출판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미국 시장에서도 판매가 시작되었다. 출판 후 꼭 10년이 되던 해에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통해 독일어를 포함, 3개 국어로 오스트리아의 출판사에서 출판의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때 그 책의 제안을 거절한 뉴욕 출판사의 주니어 편집자가 훗날 시니어 편집자가 되어 다시 나를 찾아 나의 두 번째 책인 <젊어지는 샘물>을 출간했으니, 운명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전 <나무꾼과 호랑이 형님>의 17쇄 책이 배달되었다. 초판 1쇄가 1988년이었으니 무려 34년의 긴 역사를 이어온 셈이다. 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는 오래이나 ‘스튜디오 바프’를 설립하여 ‘북프로듀서’로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프로듀싱해온 것도 어언 27년째이니, ‘호랑이 형님’이 이끌어주신 긴 세월에 깊이 감사드린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 본 콘텐츠는 발행사에서 제공하였으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재배포 등을 금합니다.


포스트 공유하기     
월간에세이 Essay

월간에세이 Essay

정기구독 상세보기